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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Jun 21. 2019

도쿄 여행기 8일 차

2018.8.4.

마지막 날. 여덟 시 반에 모였다. 아침을 먹는데 민이 조심스레 묻는다. “상진아. 너 여기 와서 카레 먹은 적 있냐?” 조식 메뉴에는 카레가 없다. 무슨 질문일까. “아니. 없는데.” 무심히 답했는데 오랜 친구인 곽이 캐치한다. “우리 오늘 점심 카레돈가스 먹자. 민사마 처음 왔을 때부터 그거 먹고 싶어 했잖아.”

늘 그런 식이었다. 민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잘 사양한다. 어제는 점프샵 앞 포토존에서 민이 내 사진을 찍어주었다. 다 찍고 나서 “너도 찍어줄까?” 했더니 “아냐, 괜찮아.” 하길래 별로 찍고 싶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잠시 화장실 다녀온 사이 같은 장소에서 곽이 민을 찍어주고 있었다. 아휴. 한 번 더 물어봐줄걸.

그러니 나한테 먼저 카레 먹은 적 있냐 물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먹고 싶었던 걸까. 아이고. 민아. 이 배려심 넘치는 친구야. 카레가 먹고 싶으면 그냥 카레를 먹자고 이야기해. 말 안 하면 잘 모른다고.


조식 후 마지막 대욕탕을 했다. 짐을 싸 프런트에 맡기고 체크아웃을 했다. 언제나 여행의 마지막엔 기념품을 산다.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한참 걷다 보니 옆 골목에 링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도 수십 명 모여 있었다. ‘경기가 있나? 복싱? 설마 이 날씨에?’ 한국에선 잘 보지 못하던 풍경이라 호기심이 일었다. “가보자.” 관객이 아주 바글대는 수준은 아니어서 링 가까이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잠시 후 한 여자 프로레슬러와, 여장한 남자 프로레슬러가 링 위로 올라왔다. ‘이렇게 더운데 괜찮을까.’ 지나친 걱정이었다. 땀이 비 오듯 해도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유쾌한 몸짓으로 관객을 웃기고, 화려한 기술을 걸고, 당할 때면 과장되게 나가떨어지는 모습은 역시 프로다웠다. 프로레슬링 경기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더욱이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라니. 웃고, 놀라고, 손뼉 치며 우리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첫 경기는 여자 프로레슬러의 승. 승자가 링 아래에서 세리머니 하며 퇴장하는 사이 다음 선수들이 입장했다. 이번엔 남자 넷. 2:2 태그매치다. 선수들의 여유로 보나 관객들의 반응으로 보나 전 경기보다 훨씬 베테랑 선수들임이 확실했다. 링 위의 선수도 링 아래의 관객도 모두 즐거워 보였다. 문득 연극이 하고 싶어 졌다. 기가 막힌 연기로 관객을 완전히 홀려버리는, 그런 공연이 하고 싶어 졌다.

경기는 계속 이어졌다. 더 보고 싶었지만 쇼핑 때문에 나왔다. 살 것이 있다는 곽을 따라 유니클로로 갔다. 한국에선 품절되었다는 검은색 감탄팬츠가 여기엔 있었다. 곽은 그걸 샀다. 그 외에는 대부분 한국에서도 살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와 민은 구경만 했다.


일본에 여러 번 와 본 민은 일본에서 사가야 하는 물건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도 민을 따라 사기로 했다. 번화가를 헤매다 민이 정한 곳으로 들어갔다. 올리브영처럼 식품, 약품, 화장품까지 안 파는 것이 없었다. 동전파스, 발파스, 세안(顔)제, 세안(眼)액 을 샀다.

점심시간. 곽이 꼭 카레돈가스를 먹어야 한다며 유난을 떨었다. 민은 손사래 치며 다른 걸 먹어도 좋다 했지만, 나도 카레돈가스를 먹지 않고는 귀국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고릴라 그림이 그려진 고고커리에서 카레카츠와 비루를 시켜 먹었다. 민이 참 좋아했다.

어쩌다 동신고 이야기가 나왔다. 동신고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학교였는지, 특히 교사들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다. 옛날이야기가 대개 그렇다. 신이 난 곽과 민의 추억 이야기는 식사를 마치도록, 자리를 옮기고 커피를 다 마시도록 끝나지 않았다. 교실 사물함 안에다 장수풍뎅이를 키워 별명이 파브르였다는 친구 이야기와, 어떤 학생이 자신을 욕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일주일 동안 수업 대신 그 학생을 찾는 수사를 했다는 담임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뭣보다, 곽과 민이 워낙 즐거워하니 나도 즐거웠다.


두시 반. 호텔에 복귀해 짐을 찾았다. 둘은 나리타 공항으로, 나는 하네다 공항으로 간다. “얘들아. 들어가서 보자.” 신주쿠 역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신주쿠에서 야마노테선을 타고 시나가와로, 시나가와에서 게이큐 본선을 타고 하네다 공항으로 왔다. 핸드폰을 충전하며 여행기를 썼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구경했다. 3층 전망대에서 밖을 바라보다 셀카를 찍었다.

출국심사를 하니 면세점이 나온다. 술 담배 좋아하는 친구들을 위해 싱글 몰트 위스키와 아이코스 히츠를 샀다. 생맥주도 한 잔 했다. 비행기는 예정보다 25분 늦게 출발했다.

기내에서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는데 옆자리 어르신이 보는 책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양자역학의 역사와 철학>. 어쩌면 재미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 보시기엔 너무 어려운 책 아녜요?” “아, 계속 보던 거라서.” 퉁명하신 어르신. 더는 귀찮게 않기로 했다.


김포 도착. 비행기 모드를 해제하니 밀렸던 문자가 한 번에 날아든다. 톡을 보내며 한국 인터넷이 얼마나 빠른지 다시 실감한다. 입국심사를 하고, 수하물을 찾고, 세관을 거쳐 공항을 빠져나온다. 한글로 적힌 표지판들이 반갑다.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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