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트 해링턴 주연의 <Doctor Faustus> 공연 당일의 사건.
코벤트 가든 근처의 Duke of York's theatre 앞에는 공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사람들이 바깥까지 줄을 서있었다. 웅성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공연장을 찾아 간 사람들과 나는 이상한 촉이 와서 '설마'했다.
아,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스탭에게 물어보니 기술적인 문제로 오늘 공연이 진짜 '취소'라는 것이다. 왜 그런 촉은 대체 이렇게 잘 맞는 것이며, 하고 많은 공연일자 중 예매한 그 날짜의 딱 그 시간이었던 걸까. 굉장한 우연의 일치였다. (공연을 보러 갔는데, 왜 보지를 못 하니...)
문제의 공연은 <Doctor Faustus>였다.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에서 실질적 주인공인 존 스노우의 역할을 맡고 있는 키트 해링턴이 캐스팅된 연극이었고,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배우인만큼 관객층도 매우 다양한 편이었다. 뭐 물론, 런던의 경우 관객층이 다양하긴 하지만 연극 공연의 경우는 백발의 어르신들이 공연장을 찾는 경우가 가장 많은 듯 한데 이 날도 그랬다.
그럼 취소된 공연은 어떻게 하나해서 해결방안을 물어보니 다른 날짜로 바꾸어 공연을 볼 수 있게 해주거나 환불을 해주는데, 공연장에 있는 티켓 판매 업체는 ATG이니 다른 사이트를 통해 구매했다면 그 쪽 업체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라고. 나는 하필 다른 사이트를 통해 티켓을 구매했었던지라 통화를 해서 다른 날짜로 변경요청을 했고, 공연장 측과 공연 취소 상황에 대해 확인한 후 연락을 받기로 했다. (당장 공연이 취소되었으니 티켓회사들 쪽에서도 별 다른 연락을 받은 게 없는 모양이었고, 사실 확인 및 이후에 변경을 요청한 날짜까지도 처리되는 데에는 꽤나 오래 걸렸다.)
그러던 차에 중간에 땡땡땡하고 누군가 종을 친다. 조용해진 장내에 누군가가 안내를 하는데, 공연이 취소되었으니 키트 해링턴이 관객과 만나서 인사하고 사진을 찍어주거나 싸인을 해주는 시간을 갖는다고 하지 않나!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술렁거렸고 다들 조금 들뜬 것 같았다. 곧 키트 해링턴이 나와 관객에게 사과 인사를 했고, 줄을 서서 싸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사람들은 안내에 따라 줄을 맞추어 섰다. '아직 너 살아있는 거 맞니?'라며 당시 새 시즌을 시작하기 전이었던 왕좌의 게임에 대한 에피소드나 스포일러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 배우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서 관객들에게 한 명 한 명 공연 취소에 대해서 사과하고 인사하며 함께 사진을 찍는 것도 신기하긴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여유로워보이는 관객들도 나에게는 정말 생경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먼저 인사를 나누고 돌아가는 관객이 키트 해링턴에게 잘 있으라는 인사를 하고 먼저 가는 모습도.
'Take care, Kit!'
나와 같이 갔던 사람들은 그 상황이 조금 더 재미있어보였다. 현장에서 고성이 오가거나, 환불이나 취소로 인한 보상에 대해 실랑이를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공연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나, 공연을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관객이나 그 누구도 심각한 얼굴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잠깐만, 이런 상황에 쟤네 지금 웃고 있는 거야?'
심지어, 매표소에 있는 직원도 웃으면서 안내를 하고 있었고, 관객들도 편안하게 서로 대화를 한 후 돌아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이 상황은 키트 해링턴의 인사 이후에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
난 찬찬히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과 동시에 이 사람들에게 살면서 자연스럽게 습득되었을 문화 생활에 대한 성숙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히 내가 넘겨짚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왜, 이런 상황이 적잖이 나에게 충격적이었을까. 한국에서 아수라장인 공연 현장을 겪으며 화를 내는 관객들과 매일같이 마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상황은 나에게 너무 생소한 것이었다. 배우가 나와서 인사를 하고 사과를 할 땐 좋은 것 같아 보여도, 뒤돌아 매표소로 향하면 독설을 그 쪽으로 향하는, 목에 칼을 품은 사람들을 나는 너무 자주 보아왔다.
심각한 문제를 일상처럼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면역력은 어느 정도일까.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본인들이 제공받는 서비스의 질이 느리고 답답해도 그리 크게 인지하지 못하는 듯 해 보였다. '응, 느리고 말도 안 되게 이상하지. 우리도 불편해'라고 말하는 그들은 그래도 그게 큰 문제라고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었다. 무조건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친절하게'를 강조하는 한국의 서비스와 업무 환경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그 공기는, 우리에겐 문화이자 불문율이지만 유럽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냥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불편함이고, 그래서 그 문제를 고쳐내야할만큼의 수고를 감수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았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사람'이니.
유럽에 와서 런던에 살면서, 그리고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느낀 건 '서두르고 있는 건 나 혼자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너무 불안하고 답답하고 급한데, 모두들 여유를 가지고 모든 문제를 대해 가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심지어 버스를 타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도 나 뿐인 듯 했다. 이걸 문화의 차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못내 표현이 덜 된 듯하고 그렇게 단정짓기에는 너무 섭섭하지만, 내가 그렇게 여유있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렇게 바뀌는 건 쉬워보이지도 않는다. 상황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서 조금 더 여유를 갖기 위해 노력하면 나도 조금 더 관대해질 수 있을까.
좀 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조금 쫓긴다고 발을 동동거리지 않길 바라고, 뒤쳐질까봐 너무 서두르지 않길 바란다.
잔디에도 잠시 앉아서 하늘을 볼 시간을, 커피를 한잔 마실 수 있는 시간을 잠시나마 나에게 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