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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고,살아보고,살아지고,살아있고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를 위해 



살아내기(살다+내다)


그냥 사는 것으론 부족하고, 살아내야 사는 삶

그게 어릴적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삶이었다. 


아버지는 살아내기 위해서 퇴근 후 매일 술을 드셨고

어머니는 살아내기 위해서 종교를 품으셨다. 


나는 매일 자유롭지 않은 자율학습을 했으며

오늘 자서 오늘 일어나는 일상을 반복하며

수능 로또를 향해 정조준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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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학 이후의 삶은 더했다. 

매일 살아 내야했다. 

항상 제출하듯 살았다.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학업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언가 내야만 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특정할 순 없었고

그들의 특정한 평가에서 

정상 범주안에 들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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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지만 부지런한 척 해야 했고

눈물이 나지만 웃는 척 해야 했고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척 해야 했고

뮤지컬을 하고 싶지만 공부를 하는 척 해야 했다

그렇게 살아 '내는' 삶은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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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기(살다 + 보다) 


살아내는 삶은 애쓰는 삶이다. 

스테이크 써는 칼로 나무를 베고 있어도

땀흘리며, 포기하지 않고, 열정을 다하면

인정 받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스테이크칼로도 나무를 넘어뜨리는

퍼포먼스를 내는 사람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나 역시 그런 영웅이 되고 싶었고

내가 가진 칼의 이가 다 빠지고 나서야

그런 영웅은 타고 나는가 보다 생각하고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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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내가 알던 영웅들 역시

말 못할 사정을 하나씩 안고 

이가 빠진 칼을 숨긴채 불안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타고난 애쓰는 성향 덕분에(?)

자신들이 어떻게 사는지 볼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잠깐 멈춰서 

살아'보는'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살아보는 것도 하지못하면서

계속 살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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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는 것은 남의 삶을 사는 것과 같다. 


"나는 살아내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알고나 말해"

"여유있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이 말은 나 역시 세상에 던졌던 말이다. 

살아낼 수 밖에 없는 삶의 순간은 누구나 존재한다. 


하지만 나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살아내지 않고도 살아지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살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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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위해서는 살아내던 것을 잠깐 멈춰야 한다. 

삶은 우리에게 잠깐 멈춰보라고 여러가지 

사건,사고를 던져준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또 살아낸다. 


제발 살아보자. 


나도 모르게 명상에 끌린다면 살아보라고 끌리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글쓰기에 끌린다면 살아보라고 끌리는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을 관찰하고 일단 좀 보자. 


살아내는데 소모되는 에너지를 

살아보는데 아주 조금만 나눠주면 된다. 

그정도로 보기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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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지기 (살다+진다)


빼앗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줄 알며 산다. 

빼앗기면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것처럼 알고 산다. 


무시당하면 분해서 잠을 못자고

하루종일 복수를 꿈꾸면서 산다. 


살아보다보니 살아진다. 


살다가 지는 일은 자주 벌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지더라도 내 삶을 내가 볼 수 있으면

금방 바로 세울 수 있다. 


지지 않기 위해서 사는 것 역시 

살아내는 것의 일종이고 그만큼 에너지 낭비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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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틈이 많다는 놀림을 자주 받는다. 

콘텐츠가 세련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더 잘하는 누군가와 비교한다.  


오케이, 나는 그 사람에게 졌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나는 지금 여기서 행복한데 

어쩌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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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이렇게 살다보니, 

오래 곁에 있던 사람들은 

나의 빈틈까지 나로 봐준다. 

그래서 나는 살아낼 필요가 없다. 

그렇게 살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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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기 (살다+있다)


나는 자주 아무 생각이 없다.


가끔 정말 아무 생각없는 나를

인식하며 생각의 물꼬를 틀 때

처음 드는 생각은 

'내가 살아 있네' 이다. 


바로 뒤 따라서 죽음이 떠오른다.

그리고 가족이 떠오르고,

소중한 친구들이 떠오른다.


가보지 못한 곳들이 떠오르고

세상에 아직 꺼내 놓지 못한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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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을 확인하고 나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확실시 되고

그 때 호흡을 느끼면 

온몸에 전율이 도는 

전기충격 감사를 느끼게 된다.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로

전기 충격 받은 듯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감사가 밀려온다. 

그렇게 나는 지금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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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살아 '내고,보고,지고,있고'


이것들에 서열이 존재하는건 아니다. 

그리고 각 상황이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계절이 바뀌듯,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듯

계속 바뀐다. 


다만 살아'내는'게 

삶의 맛의 전부라 한정지으면 

우리들 삶을 반에 반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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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는게 틀린 것도 아니며

살아보는게 정답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저중에 

하나만 고집하는 것은

무조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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