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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참 잘 왔다 — 출판기념회, 특별한 하루

1.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리던 날


“여기까지 참 잘 왔다.”
그 문장이, 오늘 내 마음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공저로 함께한 열 명의 작가들.
그들과 함께 만든 책의 출판기념회가 다가오자
단체방에 참석 여부를 묻는 투표가 올라왔다.


나는 ‘참석’에 체크를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좋은 것도, 설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음 한편이 조용히 흔들렸다.

행사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겹치는 일정이 많아졌다.
그래도 약속했으니 지켜야 했다.


그날 올라온 공지에는

‘오프닝 무대, 작가 5분 스피치, 사인회,
그리고 초대할 사람을 적어주세요’
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 문장을 읽으며 한참을 망설였다.
누구를 초대할까. 가족? 친구?


2. 가족 대신 친구를 초대한 이유


큰아들에게 말하면 분명 가족이 다 함께 올 텐데,
출장을 막 마치고 돌아온 아이에게 그 말을 꺼내기가
왠지 미안했다.


“주말에 뭐 하니?”
“피곤해서 그냥 좀 쉬려고요.”
그래, 쉬어라.
그 한마디를 내뱉고 나서야
내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도 이제는 조금 성장했나 보다.


대신 마음속에 오래 남은 친구들을 떠올렸다.
쉰이 넘어 만났지만
오랜 벗처럼 서로를 아껴주는 인연.
그들에게는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출판기념회가 맀어!!!•
그랬더니 친구들은 말했다.
“당연히 가야지!”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3. 길 위에서 다져진 마음


행사 전 날 동호회 회원들과 남파랑길 거제 구간을 걸었다.

바람이 부는 길 위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 길처럼, 내 삶도 천천히 걸어왔구나.’

동호회 운영진 회의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밤 아홉 시가 넘었다.


“헉, 내일 스피치가 있지!”
급히 원고를 쓰고, 지우고,
다시 읽으며 시간에 맞춰 연습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진심이면 충분했다.


4. 그날 아침, 함께 가주겠다는 말


행사 당일 아침
남편이 함께 가주겠다고 했다.
그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부산 외곽까지 가는 길
차 안에서 다시 원고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바람이 불었지만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스푼이 있다면 저 구름을 떠먹고 싶다.”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남았다.


5. 울컥했던 순간


작가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사인회 준비가 시작되었다.
공저라서 서로의 책에도 사인을 해야 한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중간중간에 서서 사인을 했다.
경험 많은 작가들은 한 장에 다 적어오셨다.
역시 다르다, 싶었다.


그리고 오프닝.
바이올린이 흐르고 있었다.
‘거위의 꿈’.
그 음색이 마음에 닿자
갑자기 울컥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고였다.
옆 작가님이 조용히 손수건을 내밀어 주셨다.
그 순간, 내 안의 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6. 내 차례, 그리고 감사

드디어 내 순서.
떨림을 누르고 마이크를 잡았다.
남편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내 안의 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 어떤 날보다 마음이 따뜻했다.


행사가 끝난 뒤,
남편과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나눴다.
그때 남편이 내 사진을 가족방에 올렸나 보다.
큰아이가 메시지를 보냈다.
“왜 말 안 했어요? 서운해요.”
미안했다.
“다음번엔 꼭 참석해 줘.”
아이는 말했다.
“못 가더라도 꽃이라도 보낼 수 있었는데요.”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7. 특별한 날의 여운

행사 후
친구들과 근처 식당에서 칼국수와 파전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참을 웃었다.


남편과 친구들이 한자리에 이렇게 오래 있는 건 처음이었다.
서로 어색할 법도 한데,
이상하리만큼 잘 어울렸다.


오늘 나는 원피스를 입었다.
늘 등산복 차림이던 내가
오늘은 조금 다르게, 조금은 여성스럽게.
그냥 그러고 싶은 날이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했지만,
이 마음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그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오늘, 참 특별한 날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
여기까지 참 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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