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은 결국, 나 자신을 오르는 일이다.
지리산 종주, 처음에는 화대종주를 하려 했다.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약 45km —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었던 길이었다.
하지만 서울 일정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막차를 놓쳐 구례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성삼재로 향하는 것.
그렇게 화대종주 대신, 성종종주가 되었다.
성삼재에서 중산리까지 약 34km의 길.
조금은 아쉬웠지만, 이렇게라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새벽 세 시, 성삼재에 도착했다.
캄캄한 하늘 아래 헤드랜턴 불빛이 흔들렸다. 장비를 챙겨 노고단을 향해 걸었다.
비가 올까 걱정하던 후배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발걸음이 유난히 빨랐다.
날은 무더웠고,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잠시 쉬며 이른 아침을 먹었다.
그때였다.
빗방울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날씨요정’으로 불릴 만큼 산행마다 날씨 운이 좋았지만,
오늘만큼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괜찮겠지?” 누군가 묻자,
“괜찮아, 그냥 가보자.”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렇게 시작된 빗속의 산행.
비는 점점 굵어지고, 산길은 진흙탕이 되어버렸다.
방수 스프레이를 뿌린 등산화도 소용없었다.
바짓단은 흙투성이, 양말은 축축이 젖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담담했다.
우비 안으로 스며드는 빗물보다,
내 안의 망설임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이게 우중산행이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두려움은 언제나, 겪기 전엔 더 크게만 보인다는 걸.
노고단을 지나 연화천 대피소로 향하는 길.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만할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발은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만 더, 또 한 걸음만 더.
그때 옆을 걷던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지리산은 오르막, 내리막, 지리지리 하다고 해서 지리산이래.
이런데 또 오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천천히 가면 된다.
산은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나의 속도 그대로, 묵묵히 받아줄 뿐이다.
연화천 대피소에서 젖은 옷을 말리며 점심을 준비했다.
배가 고파 결국 2일 차 저녁거리였던 삼겹살을 다 먹어버렸다. 그 덕분에 남은 이틀은 햇반과 고추장으로 버텨야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시간이 두고두고 웃음이 될 줄은.
벽소령 대피소에서 젖은 옷을 다시 말리며
오늘 하루의 길을 떠올렸다.
숨이 가빠지고, 다리가 떨릴 때마다
내 안에서 들려오던 목소리 하나.
“괜찮아, 너 잘하고 있어.”
그 말이 어쩐지 지리산의 목소리 같았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수많은 대답을 얻는다.
다음 날, 장터목 대피소에서 2박 후
새벽 5시 천왕봉을 향해 나섰다.
“지리산 일출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말을 떠올리며. 새벽 6시 10분, 드디어 해가 올랐다.
한 줄기 붉은빛이 하늘을 찢으며 산을 덮었다.
그 장면 앞에서 말없이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걱정만 하고 나서지 않았다면,
이 풍경은 내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리산이 내게 가르쳐준 건 단 하나,
인생의 길도 결국 한 걸음씩 걷는 일이라는 것.
빠르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 속도로 걷는다면, 그게 바로 나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