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뮤지션 유럽을 가다

기회의 땅 유럽

by 나의기쁨

재즈의 역사, 그러니깐 60년대 이후의 재즈씬의 흐름을 아시는 재즈 마니아 분들이라면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아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기회의 땅 유럽'이라는 말이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한번 돌아보고자 하는데 이 이야기는 아마도 재즈라는 음악 장르에 한정 짓기 힘든 현실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말 슈퍼스타들만이 음악 하나만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인디 음악씬을 봐도 그렇다.


음악만으로 생활할 수 없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업이 하나 그리고 그 이후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서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삶을 이어간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라 하는 래퍼 P-TYPE이 중간에 래퍼 그만두고 광고일하다가 '킬링 보이스'에서 '돈키호테'에서 던지고 'DOPPELGÄNGEM'에 받아치는 가사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내가 잠든 무덤가에 마이크 하나만 던져다오"

"니들이 날 묻으려던 무덤가에, 저스디스가 놓은 마이크하나'


이런 실력파 래퍼조차도 시대적인 변화 속에서 퇴물취급받으며 합합씬의 뒤편으로 가다 저스디스가 던진 마이크 하나로 부활하면서 얼마나 멋진 랩을 선사하고 있는가?


특히 '블루문특급'의 경우에는 밴드와 함께 한 영상을 보면 감회가 새롭다.


이번 내용은 바로 이런 뮤지션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클래식의 발상지 유럽, 재즈를 흠모하다


레코드가 생기고 이 음반들이 유럽에 건너가게 되면서 오히려 재즈에 대한 관심이 유럽에서 크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 시기가 있다.


미국 재즈 뮤지션들이 유럽을 방문해야 간혹 그들과 협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유럽의 뮤지션들이 재즈를 배우는 방법은 레코드였다.


어느 프로듀서가 프랑스의 어느 재즈 클럽에서 공연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는데 당시 레코드 녹음 기술의 한계로 실수한 부분을 지우지 못하고 그대로 실은 연주를 따라 하는 것을 본 것이다.


물론 클래식의 발상지인 유럽인만큼 이런 것들은 점차 그들이 가진 음악적 기반에 의해 발전해 가긴 했지만 아마도 그들이 정말 목말라했던 것은 미국 본토의 재즈 뮤지션들과의 협연일 것이다.


따라서 어느 미국 본토 재즈 뮤지션이 방문했다 하면 그 클럽은 뮤지션들로 북적북적했다고 한다.


또는 미국 본토 재즈 뮤지션을 초대하는 방법뿐이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다.


너무 유명해서 이 이야기를 한다면 우려먹기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Louis Malle, 누벨바그 영화의 기수중 한 명인 프랑스 감독 루이 말의 그 유명한 <Ascenseur Pour L'échafaud>, 즉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탄생 과정이다.


57년에 Marcel Romano, 마르셀 로마노라는 뮤지션이자 재즈 애호가인 그가 Miles Davis에게 파리에 와서

파리에 위치한 생제르망 클럽에서 연주를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당시 Miles Davis가 이를 수락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파리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을 모아 팀을 급조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테너 색소폰 주자 Barney Wilen이라든가, 피아니스트 René Urtreger,

Jacques Loussier에서 오랜 기간 콘트라 베이스를 쳤던 Pierre Michelot, 그리고 Miles Davis와 대동했던 드러머 Kenny Clarke이다.


그렇게 프랑스 파리 투어가 시작되던 그 해 재즈 애호가이자 그의 팬이었던 감독 루이 말이 후반 영화 편집작업을 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Miles Davis를 찾아온다.


그리고 마치 재즈 에피소드처럼 영화 작업 이야기가 오고 가고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보면서 4시간 만에 o.s.t. 가 완성되는 놀라운 일화를 여러분들은 여러 매체를 통해서 한 번쯤은 접해 보셨을 것이다.


관련 다큐멘터리나 디테일한 앞뒤 부분의 내용들은 다 자르고 소개하긴 했지만 어쨌든 Miles Davis의 자서전이나 이와 관련된 자료들을 보면 당시 유럽은 미국과는 다르게 문화를 바라보는 마인드가 굉장히 열려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르의 유행을 타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들이 미국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많은 미국 재즈 뮤지션들이 유럽으로 가게 된 시초가 된다.


Miles Davis - Générique (1958년 음반 Ascenseur Pour L'échafaud)


화려하진 않지만 2분 정도의 곡들이 이렇게 처연할 수가 있을까? 하는 희대의 명작이 아닌가 싶다.


다시 돌아와서


군대를 제대하고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달라진 세상을 경험하던 시기이다.


ADSL이 등장하고 가정에서도 쉽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된 99년에서 2000년에는 '아이러브스쿨', '다모임'같은 사이트와 수많은 커뮤니티들이 인터넷 세상에 등장하면서 많은 정보들을 접하게 된다.


당시 어느 재즈 뭐 커뮤니티에 걸린 Duke Jordan의 <Flight To Denmark>의 음반 커버는 참 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Duke Jordan이 누구인가?


Charlie Parker 시절 그와 함께 연주를 하기도 했고 블루노트에서의 리더작 등으로 기억되는 그는 60년대 이후 종적을 감추기 시작한다.


이유는 락큰롤의 등장으로 재즈의 인기가 이전과는 다르게 마치 불타버린 낙엽처럼 사그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새로운 물결이 흐르면서 그 속에서 이러한 물결에 몸을 맡겼던 Miles Davis나 Chick Corea 같은 몇몇 뮤지션들을 제외하곤 이런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뮤지션들은 잊혀졌다.


적응을 못한 건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락큰롤의 등장, 점점 뮤지션들의 음악으로 변해가는 재즈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사라지는 건 적응의 문제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재즈 클럽들의 경영 악화와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으면서 생계를 위해 뉴욕에서 택시 기사를 해야 했던 Duke Jordan 역시 그렇게 사라지는가 했다.


그러다가 60년대 후반 재즈의 인기가 프랑스, 독일, 영국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하고 이때 Duke Jordan에게도 기회가 오기 시작하는데 바로 덴마크에서 초청을 받아 유럽으로 떠났다.


그리고 73년 문제의 그 작품 <Flight To Denmark>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 음반이 대박을 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본에서의 인기가 엄청났다고 한다.


결국 그는 뉴욕을 떠나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이주를 하고 2006년 8월 8일 코펜하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Duke Jordan - No Problem (1973년 음반 Flight To Denmark)


이렇게 보면 이 음반의 표지는 눈으로 하얗게 덮인 아름다운 세상보다는 그 속에 홀로 남겨진 그의 모습이 눈과 대비되어 더 쓸쓸하게 다가오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나는 과연 그 시대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너무 커져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어라? 누가 또 생각나는데?



비슷한 뮤지션이 한 명 또 있다.


바로 Kenny Drew이다. 작곡가로서도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던 피아니스트로 비밥 시대를 관통해 온 실력파 피아니스트이다.


그 역시 Charlie Parker를 비롯해 당대의 수많은 뮤지션들과 협연을 해왔고 블루노트에서도 리더작을 발표하며 활동을 해왔지만 그는 Duke Jordan보다 61년도에 먼저 유럽 프랑스로 이주를 결심했고 64년도에 덴마크 코펜하겐에 정착했다.


이때 그가 만난 명 베이시스트가 있었으니 흔히 NHOP라고 부르는 Niels-Henning Ørsted Pedersen이다.



Kenny Drew Trio - Les Parapluies De Cherbourg (1989년 음반 Recollections)


쉘부르의 우산....


참 아름답고 멋진 연주가 아닌가!


그렇게 그는 코펜하겐을 고향으로 유럽에서 많은 뮤지션들과 협연하며 공연 및 음반 발매와 더불어 일본에서도 인기를 얻으며 뉴욕시절보다 더 바쁘게 활동했다.


물론 Enrico Pieranunzi가 이후 20년 음악 지기가 되는 Marc Johnson, Joey Baron을 만나게 한 에피소드의 장본인으로 활약한 건 덤이다!


유럽 재즈의 원동력이 되다


60년대 이후 Dexter Gordon, Ben Webster, Bud Powell 등 정말 많은 뮤지션들이 유럽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Chet Baker는 사정이 다르긴 했지만 유럽과 미국을 오가다 네덜란드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알토 색소폰 주자 Phil Woods의 경우에는 68년부터 70년 초까지 프랑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데 이때 만든 그룹이 European Rhythm Machine이다.


여기에는 Henri Texier, Daniel Humair 등 프랑스 재즈의 발전에 원동력이 되는 신진 뮤지션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8, 90년대에도 유럽을 오가던 그는 이게 또 Italian Rhythm Machine, 심지어 Japanese Rhythm Machine이라는 팀으로도 발전하면서 Enrico Pieranunzi, Stefano Bollani 같은 뮤지션들과도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hil Woods & Space Jazz Trio - New Lands (Take 2) (1990년 음반 Phil's Mood)

이 음반은 Enrico Pieranunzi가 그를 위해 만든 곡을 포함해 전곡이 Enrico Pieranunzi의 오리지널이라는 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당시 유럽으로 넘어간 많은 미국 재즈 뮤지션들은 방문하거나 이주한 로컬 신진 뮤지션들과 음악적 교류를 활발하게 하게 되는데 이게 유럽의 재즈 문화를 강국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이 당시 발매된 음반들이 놀랍게도 일본에서도 엄청나게 인기를 끌게 되면서 일본 활동으로 이어지게 되고 일본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표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더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는 것이다.


게다가 67년에는 이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재즈 페스티벌인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Montreux Jazz Festival)이 매년 7월에 열리는데 이때부터 유럽 뮤지션들과 본격적인 교류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Oscar Peterson, Ray Brown, Joe Pass에서부터 Ella Fitzgerald 같은 여성 디바에 이르기까지 축제의 장이 열리면서 이들의 교류가 잦아지기 시작하면서 유럽이라는 지역이 미국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미국 본토보다 더 중요한 곳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탑 티어 페스티벌은 몬트리올 국제 재즈 페스티벌(Montreal International Jazz Festival)이고 미국이 아닌 나라의 재즈 페스티벌이 1, 2위라는 것도 참 흥미로운 현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큰 재즈 페스티벌이 미국에 없다는 게 더 웃기지 않나?


뉴올리언스에서 열리는 New Orleans Jazz & Heritage Festival이 있긴 한데 규모 면에서는 안 되는 거 같은가 보다.




뭐 재즈를 듣는 데 이런 시시콜콜한 역사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즐기면 그만인데?


내가 볼 때 허세라는 것은 아는 것이 많을수록 크기도 그에 비례해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허세의 근육을 키운다!
운동하자!



15년간의 파리와 코펜하겐의 생활을 멈추고 뉴욕으로 귀환한 Dexter Gor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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