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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는 전혀 안락하지 않다

너는 내 마음의 훈련사

by 퍼니제주 김철휘

모순 형용


말 자체가 모순인 것들이 있다. '침묵의 소리', '찬란한 슬픔', 달콤한 이별' 같은 것들이다. '모순 형용'이라는 개념으로 불리는 이와 같은 말들은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더 깊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게 해 준다. 보통 부정적 의미의 단어에 긍정의 형용사를 붙이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찬란한 죽음... 뭔 X 소리야!


죽음은 부정적인 단어이다.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릴 땐 뭔가 께름직하고 어두운 감정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를 별로 입에 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갑자기 누군가 당신에게 "너 언제 죽을 것 같아?", "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봤어?"라고 물어본다면 "이 자식 실없는 소리 한다"라고 핀잔을 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평소에 사용하기 꺼려지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실생활의 수면 위로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때가 있다. 바로 모순되는 형용사가 죽음 앞에 사용될 때다. 어떤 이가 자신을 희생해 타인, 특히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구해냈을 때 우리는 '아름다운 죽음', '위대한 죽음', '찬란한 죽음' 등의 수식어를 붙인다. 강아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찌 보면 '개죽음'일뿐인데, 인간들은 이를 두고 아름답게 포장하기에 여념이 없다.



안락사, 모순 형용이 아니라 모순이다.


주사맞기 싫어하는 강아지.jpg 주사 맞기 싫어하는 강아지


비슷한 형태의 양상이 반려견들의 죽음에도 나타난다. 한 해에 버려지거나 길을 잃은 강아지들의 절반이 임시 보호소에서 몇 주 동안의 삶을 연명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보호소 여건상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구출된 강아지들을 장기간 맡아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안락사'라고 부른다. 풀어서 쓰자면 '안락한 죽음'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안락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다’라는 뜻이다. 다시 고쳐 이야기하면 '안락사란 편안하고 즐거운 죽음'이라는 말이다. 모순 형용의 극단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수대에 올라가는 사람에게 "당신의 죽음은 편안하고 즐거운 죽음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안락사가 아닌데 안락사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


중세 시대에는 다양한 방식의 '안락사'가 연구되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편한 방식의 죽음으로 알려진 것이 있다. 그것은 상처를 낸 발뒤꿈치를 시냇물에 담그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내 아이들과 손자들이 저 멀리서 즐겁게 노는 모습을 감상하며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큰 고통 없이 아름다운 장면을 보며 죽는다는 방식에서 이와 같은 죽음은 ‘안락사’라고 불러도 될 듯싶다. 즉, 자발적이면서 고통이 수반하지 않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형태가 '안락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비자발적이고 공포스럽기만 한 '반려동물'들의 죽음을 안락사라고 부르는 게 맞는 것일까?


사실, 안락사가 아닌데도 안락사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뭔가 석연치 않은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죽음을 미화하고 포장하는 데에는 우리가 저지른 죄와 그 죄로 인해 발생한 '고통스러운 죽음'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무의식이 작동한다. 버려지는 강아지는 우리 사회의 그늘진 뒤안길이다. 우리가 저지른 범죄(직접적으로 버렸든, 그것을 보았든, 그 사실을 들었든)로 인해 수없이 많은 강아지들이 죽어나간다. 인간에게 무의미해져 버린, 가치가 없어져 버린 그들을 죽음을 애써 ‘안락한 죽음’이라고 부르면서 ‘그래도 녀석들은 편안하게 죽은 거야, 그리고 무지개다리를 건너 좋은 것에 갔을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다.


무엇이 편안한 죽음이라는 말인가? 싸늘한 수술실에서 차디찬 주삿바늘이 내 혈관 깊숙이 알 수 없는 액체를 흘려보내는 것이 안락한 죽음이란 말인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곁에 없고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는 것이 즐거운 죽음인가?



안락사와 살처분


이제 우리는 '안락사'를 '안락사'라고 불러서 안된다. 안락한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처분', '유기사', '강제사', '고독사' 등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죽음의 실체를 보여줄 수 있는 용어라면 그 어떤 것도 괜찮다.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이 불쌍하게 죽어간 강아지들의 영혼을 떠올리게 만들고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기억하는 올바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강아지들이 버려지고 있다. 강아지들을 버리는 사람들은 강아지를 미워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강아지를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다만 강아지들을 자신보다는 덜 사랑했던, 그리고 이들을 삶의 우선순위에서 쉽게 제외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강아지들이 전혀 안락하지 않은 안락사를 당하지 않도록 강한 책임감으로 반려동물을 내 가정에 들이고, 내 반려동물이 살처분당하지 않도록 잘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반려인들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강아지에게 안락사는 전혀 연락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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