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마음의 훈련사 12화
'EBS 세계테마기행'이나 'JTBC의 톡파원 25시',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해외로 떠나는 상상을 해봅니다. 상상이 현실이 되어 실제로 여행을 떠난다면, 저를 기다릴 그 풍경들은 얼마나 황홀할까요? 이탈리아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습니다. 바람에 실려오는 신선한 토마토와 바질 향이 코끝을 스칩니다. 어느 이름 모를 성당에 들어가 오래된 역사의 향기를 맡습니다. 노천카페에서는 에스프레소 한잔에 사람들이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파리의 에펠탑 아래에서는 밤하늘에 흩어진 불빛을 보며 샴페인 한 잔을 들이켭니다. 패셔너블한 사람들의 다양한 '프로필'을 감상하며 달팽이 요리를 먹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스위스의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은 또 어떻고요. 알프스를 배경으로 드넓게 펼쳐진 호수에서 배를 타며 그 고요함에 흠뻑 빠져봅니다. 아~ 역시나 지금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당장은 여행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이냐고요. 현재 우리 부부의 자산 수준이라면 사실 어디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문제일까요? 시간도 역시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봉급쟁이가 아닌 자영업자이기 때문이지요. 가게문을 닫고 단골들에게 양해를 구한다면 한 달이라도 자리를 비울 수 있습니다. 자, 시간과 돈의 문제가 아니라면 건강상 문제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마라톤 10킬로미터 코스는 가볍게 완주할 만큼 아직은 생생한 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부부가 해외로 여행을 떠나지 못할 이유는 뭘까요?
그건 바로 ‘또복이’ 때문입니다. 또복이는 30킬로가 훌쩍 넘는 대형견입니다. 대형견은 비행기를 타도 화물칸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답답한 케이지안에서 굉장한 소음과 온도차를 겪으면서 말입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렇다고 이동하는 데만 며칠씩 걸리는 크루즈 여행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인에게 맡겨 놓고 떠나면 되지 않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지만 2,3일은 몰라도 그 이상은 또복이를 맡아 주는 지인에게도 또복이에게도 여간 스트레스가 아닐 것입니다.
사실 또복이를 두고 떠났을 때, 죄책감에 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면, 여행지에서 제가 마주할 모든 것들이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겠지만, 그런 순간에도 문득 마음 한구석에서 텅 빈 듯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는 그 순간에도, 알프스의 고요함에 제 자신을 맡기는 그 순간에도 말이지요. 그때마다 저는 아마도 집에 남겨진 또복이를 떠올릴 것입니다. 우리가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 녀석. 매일 아침 저를 보자마자 펄쩍 뛰어오르며 꼬리를 흔드는 그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어떤 멋진 풍경도 제게는 온전한 즐거움이 되지는 못할 테니까요.
오늘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합니다. 반가움으로 가득 찬 뜨끈한 몸뚱이가 저를 덮칩니다. 귀여운 털북숭이 또복이입니다. 요즘 같이 더운 날에도 마당에서 저를 기다렸나 봅니다. 등을 만져보니 온돌 밑에 손을 넣은 것처럼 따뜻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집니다. 뭉클합니다. 그 어떤 존재가 이 보다 더 진한 사랑을 표현해 줄 수 있을까요? 그 누가 이토록 나를 반겨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여행 그까짓 거 안 가면 그만이지'를 외치며 스스로를 위안합니다.
여행은 늘 새로운 경험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또복이와 함께하는 일상은 그보다 더 깊은 만족감을 줍니다. 제가 더 많은 곳을 보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것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 모든 것들이 또복이와 함께하는 일상의 소박한 순간들만큼 저에게 큰 의미를 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아마도 저는 앞으로도 이탈리아의 흥겨움, 파리의 낭만과 스위스의 풍경을 꿈꿀 것입니다. 동시에 그런 꿈을 접을 때마다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유럽여행보다 더 흥미진진한 여행이 이미 내 옆에서 매일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요. 매일 아침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그의 맑은 눈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결국, 또복이와 함께하는 이 평범한 일상이 제 삶에서 가장 소중한 ‘여행’ 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지금입니다.
다음 주부터 '또복이'와 함께는 '너는 내 마음의 훈련사'가 매주 월요일 1회 연재됩니다. 많은 양해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