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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복과 털양말 Mar 26. 2024

내 멋은 내가 부려요

모든 티셔츠를 바지 안에 집어넣는 너

  아들에게,


  너는 매일 밤 네 사진을 보고 잠들어. 네가 자라서 엄마아빠와 떨어져서 혼자 자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계속 함께 자니까 이게 가능한 것 같아. 네 아기 때 사진을 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옷도 사랑스럽게, 멋지게, 재미있게 꾸며 입었지. 네 옷을 골라 입힐 때 엄마는 참 즐거웠어. 뭘 입혀놔도 이쁘게 소화하니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겠어? 하지만 이제 너도 주관이라는 것이 생기고 네게도 입고 싶은 옷이 생겼지. 당연한 수순이야. 조금 웃긴 표현이지만, 엄마도 각오하고 있었어.


  너는 번개맨 옷을 좋아하지. 몸통의 중앙에 있는 번개 패치를 톡 치면 불이 반짝반짝 들어와. 은색 망토도 있지. 네가 망토까지 하겠다는 날에 엄마는 널 막진 않았지만 망토가 탈부착형이라는 사실에 안도하긴 했어.


  너와 같은 반 아이의 엄마는 네 번개맨 복장을 보더니 자기는 부끄러워서 자식한테 저런 거 못 입히겠다고 했어. 나는 웃어넘겼단다. 어차피 엄마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어. 그 엄마가 은갈치 망토에 반짝거리는 번개패치가 달린 옷을 입은 널 바라보는 눈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 나는 심술이 슬슬 피어올랐어. 그래서 네가 번개맨 옷을 입겠다는 날에는 네가 요구하지 않아도 내가 막 나서서 망토까지 달아줬어. 그따위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아. 그 엄마가 널 보고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미간을 찌푸리면 자글자글해지는 건 그 여자의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잖아? 나는 그런 표정을 마주할 때마다 아주 밝게 웃었어. 너는 번개걸 옷까지 탐냈어. 분홍치마에 여전히 번개 패치가 있고 망토는 금색이지. 너는 그 옷도 입고 어린이집엘 갔었어. 그땐 가을이어서 청바지를 입고 그 위에 티셔츠 삼아 번개걸 티를 입고 그 위에는 검은 맨투맨을 입었지. 주름이 잡혀있는 분홍치마가 청바지를 입은 네 허벅지를 덮었어. 나도 별로 사주고 싶진 않았는데, 굳이 남자는 이런 걸 입으면 안 된다며 막기도 싫어서 그냥 사줬지. 너는 여러 번 그렇게 입고 등원했지. 선생님들은 어머! 하고 놀랐지만, 너를 포함한 어린이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더라.

  그래도 엄마는 약간 걱정이 되긴 했어. 넌 기본적으로 양성성이 고루 발달된 아이이고, 옷까지 분홍으로 입으면 놀림감이 될까 봐서. 넌 여전히 분홍을 좋아하고, 그걸 가지고 엄마가 뭐라 하지는 않아. 엄마는 남자가 본홍옷을 멋들어지게 소화한 모습을 좋아해서, 네 아빠에게 꽃분홍색 리넨 셔츠를 입히니까. (아빠는 엄마가 입으라는 대로 입겠다고 했어.) 하지만 엄마도 분홍치마까지는 약간 어렵더라. 그래서 번개걸 치마를 입고 한 네댓 번 등원한 뒤로 앞으로는 집 안에서만 입기로 약속했지.     


  요즘 너는 모든 상의를 다 바지 안으로 집어넣어. 스웨터, 맨투맨, 반팔티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바지 안에 집어넣지. 그래서 바지 허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 그렇게 좋아하는 청바지도 두꺼운 겨울 상의가 잘 들어가지 않자 요즘은 안 입는 널 보면서 네가 얼마가 바지에 집어넣기에 꽂혀있는지 실감했어.

  

  네 외할머니는 옷을 멋스럽게 잘 입으셨어. 어릴 때 외할머니도 내게 예쁜 옷을 입히려고 하셨지. 입으라는 대로 입으면 예뻤을 거야. 그런데 나도 너처럼 직접 옷을 골라 입고 싶었지. 시키는 대로 입기 싫더라고. 그 기분을 기억해. 어느 아침에 네게 고집스럽게 옷을 권하다가 그 기분이 문득 떠올라 그냥 중얼거리고 말았어. 그래, 네 멋이야 네가 부리는 거지. 그랬더니 그 말을 듣고선 네가 “맞아요, 내 멋은 내가 부려요.” 하더니 네 멋대로 입었어. 외투까지 바지 속으로 집어넣으려 하지 않는 게 어디냐. 엄마는 그 뒤로 네 멋은 전적으로 네가 부리도록 뒀어.     


  사진과 영상을 많이 찍어줄게. 나중에 으악, 내가 왜 이렇게 입었지!! 하면서 외칠 네 모습을 상상하며. 낄낄낄.     


  이따 만나.

  사랑해.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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