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식물이 초라해 보이지 않아
난 식물이 좋다.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면 알아서 쑥쑥 자라나서 좋고, 존재만으로도 주변에 이로우니 좋다. 모두가 자기에게 알맞은 자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좋고, 제멋대로 자리 잡은 것 같아도 멀리서 보면 소박한 모습의 식물과 화려한 식물이 섞여 조화를 이룬다. 무엇보다 그 모습 안에서 소박한 식물이 초라해 보이지 않아 좋다.
마음에 품고 살던 수국을 심어놓았다. 그늘을 잘 받으며 자라길 바라서 집주인이 심어놓은 단풍나무 아래 자리를 잡아주었다. 검색해 보니 마침 수국의 자리는 큰 나무 아래라고 나왔다. 썩 괜찮은 결정을 한 듯하여 나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아니다. 사실은 그저 면장갑에 낀 흙을 털어낸 것이다. 박수는 무슨 박수. 이 정도 심어둔 것으로 만족하며 발바닥만 한 정원 풍경을 즐겨보기로 한다.
뭐... 풍경 감상 같은 호사는 이쯤에서 브레이크를 걸게 되었다. 이제는 키워 먹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내가 식물에 가지는 모든 관심을 식용 식물로 국한하기로 했다. 장을 보러 갔다가 살벌한 물가에 받은 충격이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 한 푼의 돈도 벌지 않는 요즘 내가 아이에게 집중하며 절약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약간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식물을 쳐다보면서 가계에 눈곱만 한 보탬은 될 수 있다.
집주인 내외가 집에 오겠다고 한 날 밤, 나는 팔이 떨리고 손가락이 아플 때까지 아이 옆에 누워서 전셋집을 뒤졌다. 집을 빼라고 하겠지, 하며 걱정에 빠졌다. 혹시나 아이가 깨서 무서워할까 봐 아이 곁을 떠나진 않았다. (하긴, 이젠 아이가 많이 자라서 예전처럼 그렇게 쉽게 깨지 않는다. 아침에 눈떴을 때 옆에 엄마도 아빠도 없으면 무섭다고 말하긴 하지만.) 달달 떨며 급매 매물만 올리는 카페도 가입해 보고, 기존에 올라와있는 매물도 싹 다 훑어보았다. 우리 돈으론 살 수 있는 집이 없다. 내 탓을 하게 된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5시까지 있기 시작했을 때부터 바로 일거리를 찾아 돈을 찾아 일하여 돈을 벌었어야 하는데, 내가 돈을 똑똑하게 썼어야 하는데, 이랬어야 하는데, 저랬어야 하는데. 후회가 성난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지금 그 파도는 물러갔다. 하지만 그렇게 죽일 듯이 철썩이지 않을 뿐이지, 계속 그 짠 물로 해변을 적신다. 나도 그렇게 해변처럼 축축하게 젖어있다. 번역 일거리를 찾을 수 없으려나? 하면서 계속 스마트폰을 본다. 그러다 현재 출판계에 있다는 사람이 단 댓글을 보았다. 몇몇 출판사에서는 AI번역기를 사용해서 원고를 만들어낸다는 소문이 있단다. AI의 공격이 벌써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집주인은 우리에게 이 집에 살면서 더 정도 붙이고 가계 상황도 나아지면 집을 사라며 설득했다. 남편의 예상이 적중했다. 집과 마당의 상태가 어떤지 볼 겸 집을 사라고 설득하려고 찾아온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사에 질렸어, 따위의 대화를 나누어본다. 질린 게 사실이니까. 대출을 받아서 어떻게 되지 않을까? 나이브한 생각도 해본다. 다음날 남편은 대출금 계산을 해보았다고 한다. 남편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둘이 눈 맞추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 집은 25년 된 주택이다. 이곳에 전세로 살고 있다. 이게 우리의 최대치였다. 이제 나도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