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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복과 털양말 Jun 24. 2024

오르페우스 이야기

“에우리디케는 하데스 무릎에 기대서 잘 지내고 있는데요?”

  아들에게,     


  유치원 선생님은 네가 입학한 뒤 그저 한글에 조금씩 노출만 시킬 생각이라고 하셨었지. 너는 점점 이건 어떻게 읽냐, 저건 어떻게 읽냐 물어봤고, 엄마는 성실하게 대답해 줬어. 그랬더니 너는 금방 배워버렸지. 가나다라 브로마이드도 붙여본 적 없는데. 작심하고 앉아서 한글공부를 하자고 한 적도 없는데. 아무래도 일곱 살 형아누나들이 있으니까 어깨너머 배우는 게 있었더라. 이래서 둘째들이 빠르다는 소리를 듣나 보다 하고 생각도 했지. 이제 너는 천천히 읽지만 너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거야. 축하해.


  넌 요즘 정말 많이 성장했어. 무서움 타는 것도 줄었지. 엄마가 양치하고 갈 테니 먼저 침대에 가서 인형이든 장난감이든 가지고 놀고 있으라고 하면 넌 무섭다며 화장실 문 앞에 딱 버티고 서서 엄마와 같이 움직였어. 하지만 며칠 전에는 네가 아주 쿨하게 말했어. 그럼 엄마가 양치하는 동안 난 누워서 책 보고 있을게요, 라고.      

  네가 고른 책은 아람북스에서 나온 그리스로마신화 책 중에서 오르페우스 이야기였어.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다시 살려내려고 저승으로 가는 남자지. 이승에 다 올라갈 때까지 뒤따라오는 에우리디케를 보면 안 된다고 했는데, 오르페우스는 자기가 이승에 도착한 뒤 이쯤이면 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뒤돌아봤어. 에우리디케는 자신보다 한두 걸음 뒤에 있었으니 여전히 저승 땅에 있었고, 눈앞에서 다시 저승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는 이야기지. 그 정도는 엄마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야기였어. 엄마는 양치를 다 하고 너한테 무슨 이야기였냐고 물어볼 생각에 웃음이 막 낄낄 나더라고. 신나잖아. 아들이 책 읽고 이야기를 설명해 주다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다 나네. 어떻게 됐어? 내가 눈 동그랗게 뜨고 물어봤더니 네가 당당하게 대답했어.

    

  “에우리디케는 하데스 무릎에 기대서 잘 지내고 있는데요?”     


  음? 아들아, 그런 이야기가 아닐 텐데?      


  내가 네 책을 받아 들고 다시 봤더니, 너는 그림을 보고 헷갈린 거였어. 하데스 무릎에 기대어 눈 감고 있는 여자는 하데스의 부인 페르세포네야. 피부가 희고 머리가 길어서 에우리디케랑 헷갈렸더라. 엄마는 그냥 그 상황이 재미있어서 웃었어. 그런 식으로 웃으면서 놀라면서 끔찍하다고 하면서 신나 하면서 읽다 보니 서른 권을 다 읽었네. 유치원 누나가 읽는 책이라면서 너도 읽고 싶다고 해서 전집을 대여했는데, 잘한 것 같아. 네가 약간 책을 훼손시켜서 아무래도 배상하라는 말을 들을 것 같긴 한데, 그건 배상할 일이 맞으니 어쩔 수 없지. (대체 뭐가 묻은 거였을까?)


  어제 아빠는 과제를 완성해야 한다면서 사무실에 가서 집중해서 마치겠다고 했고, 우리는 저녁에 아빠를 데리러 가기로 했지. 가는 길에 우리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이름들 중에 ‘아’로 시작하는 이름 대기, ‘헤’로 시작하는 이름 대기, ‘스’로 끝나는 이름 대기를 했어. 네가 재미있어하면서 제안해서 엄마도 다 굳어가는 머리를 좀 굴려봤더니 많더라. ‘아’는 아레스, 아르테미스, 아리아드네, 아테나, 아폴론, 또 ‘헤’는 헤라, 헤라클레스,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너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괴물들도 좋아하지. 메두사, 미노타우르스, 켄타우로스, 스핑크스, 세이렌 등등. 그리스로마신화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엄마도 네 덕분에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 보냈어.     


  역시 너는 내 복덩이야.     

  오늘은 태권도 가는 날이네. 오늘도 기합 힘차게 넣어보자.     


  사랑해.

  이따 만나.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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