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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rollope Jul 31. 2021

워킹데드(Walking Dead)

미국의 유명한 보수주의 소설가 아인 랜드는 이렇게 말했다. 투쟁하지 않는 인간은 좀비와 같다고. 물론 그녀가 말한 좀비는 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좀비가 아니다. 여기에서 좀비란 살기 위해 사는 인간, 목표를 위해 사는 경주하지 않는 인간, 삶과 죽음 사이 선택의 기로에 서기를 거부하는 인간, 무가치한 삶을 사는 인간을 가리킨다. 투쟁은 인간을 인간답게, 삶을 생기있는 것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만든다. 투쟁은, 우리가 언젠가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 나와,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인간의 삶은 그 계속적인 위험과의 투쟁 속에서 비로소 살아있다. 즉 죽음이야말로 삶을 극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녀의 생각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테마의 매력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렇다. 지속적인 투쟁은 우리에게 활력을 준다. 투쟁하는 인간이 곧 살아있는 인간이다. 그렇지 않는 인간이라면, 그것은 좀비일 뿐이다. 


워킹데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를 다룬다. 주인공 릭, 그는 경찰인데 범죄자를 쫓다가 총상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다가 -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 깨어나보니 세상이 좀비가 창궐한 상태더라 라는 설정이다. 도로 위에는 차가 멈춰서있고 길 위에는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으며 건물과 상점은 텅 비었다. 세상이 온통 좀비로 둘러싸여 버렸다. 이 드라마는 이러한 좀비 사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내용이다. 누구와? 그건 바로 다른 사람들이다.  


좀비물이라는 장르의 가장 큰 특징이 여기에 있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짓는 것이 이족보행(Waling)이라고 할 때, 두발로 걷는 것은 사람 뿐이다. 줌비는 두발로 걷지만 사람이 아닌 것들이다. 무엇으로 그들을 구분할까 우리는 왜 싸워야 할까. 좀비물에서는 대개 그 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살기 위해 그들과 싸워야 할 뿐이다. 이러한 피아구분의 인식이야말로, 보수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좀비물의 다수가 이런 보수적 가치관 위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좀비로 비유하길 좋아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때문에 이 드라마의 배경이 조지아 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Wind>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조지아 주는 미국 남부의 대표적인 보수 주 보수의 심장이다. 그리고 총은 자신을 지키는 당연한 권리다 라는 헌법수정 2조를 철썩같이 믿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말이 있다. 좀비 영화에서 좀비가 빠질 수는 있어도, 총이 빠지면 좀비 영화가 아니라고. 이 드라마에서도 총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라서, 모두가 총을 들고 있다. 총기 소유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권리이고, 나와 가족을 위협한다면 여기에 대항해서 총을 드는 것은 당연한, 자연스러운 권리다. 나, 우리 가족, 국가를 위협하는 적을 상대하는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다. 


좀비와 나를 구분하는 것은 두발로 걷는 것에 있지 않다. 저들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인간이 아닌 것들이다. 그러므로 싸워라. 이 드라마에서, 좀 더 좁혀보자면 시즌2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바로 여기다. 그린 농장의 헛간 앞에서 셰인이 연설을 하는 부분이다. "저놈들은 인간이 아니다 우리와 다르다 저놈들이 우리 전부를 죽일꺼야 저놈들이 우리 옆에서 살고 있는걸 참고 지내는 것도 이젠 충분하다 만약 살아남고 싶으면 싸워라." 그리고 이 광기를 멈춘 것은 헛간에서 걸어 나온 마지막 좀비였다.(스포일러!) 이 순간, 이것이 가장 극적인 장면이었다.


아마도 좀비가 실제로 창궐한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이 우리 사회 내부에서 발생한다는 점이야말로 좀비가 갖는 가장 무서운 요소가 될 것이다. 외부의 위협은, 우리를 단결시킨다. 그게 누구든. 적이 우리 문앞에 있다는 호소 만큼 효과적인게 없다. 하지만 좀비는, 방금 전까지는 같은 인간이었어도 일단 경계를 넘어서면 그들과 우리를 구분짓는 뭔가가 주어지고, 그 경계를 넘어서면, 좀비가 된다. 아니 좀비로 분류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분짓고 경계짓고 '그들'로 부르며 배척하는 것이, 실은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사실을 언제쯤 깨닫게 될까. 생존을 위해서는 투쟁하라는 호소가, 우리를 인간답게 하기 위한 투쟁이, 실은 우리를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사실 말이다.


초기 워킹데드의 인트로는 오싹할 정도로 멋지다. 특히 처음에 나오는 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장면이 가장 좋다. 좀비가 된 부인이 매일 밤 집에 찾아와서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애쓰는 장면이다. 문 뒤에 선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다. 그는 좀비가 된 부인을 끝내 쏘지 못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의기양양한 선언이 있었던 이후 30년, 오늘날 좀비물 장르의 범람을 보면서 음울한 불안감을 느낀다. 오늘도 한반도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적이 문 앞에 와 있다고 계속해서 소리 친다. 무기를 들어라 라고. 싸우라고. 그들을 미워하고 그들을 죽이라고. 계속해서 피로감이 쌓여 가지만 이 긴장감은 끝내 해소되지 못한다. 그리고 밀려오는 패배감.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보수라는 사람들은 국가나 정부, 사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란 건 없다. 마거릿 대처가 이렇게 말했다지.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개 대중에 맞서 오롯히 존재하는 개인이라는 개념을 좋아한다. 무능력하고 지성을 갖지 않는 다수 - 좀비들 - 그것에 대항하는 개인. 너를 지켜줄 수 있는건 오로지 무기를 들고 투쟁하는 너 자신 뿐이다. 국가나 사회에 기대하지 마라. 눈 앞에 보이는 저것들이 인간과 닮았지만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라는 외침. 오해하지 말 것이, 나도 좀비물을 좋아한다. 하지만 좀비가 등장하고 십분만 지나면 방금전까지 사람이었던 '무언가'의 머리를 내려치는게 너무나 당연한 세상이 되는 그런 작품들은, 가끔 어딘가 음울한 예고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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