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이 꽃을 피우다.

김기훈의 아침에 쓰는 우표 한장 생활칼럼

by Kimkihoon

自有幽香似德人 자유유향사덕인

스스로 그윽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마치 덕이 높은 사람과 같다.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햇살은 시간의 흐름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작을 알리는지를 보여주는 시계와도 같다. 그 시계의 찬란함은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근원으로 태양을 찬양하게 했다. 우리 집에 찾아오신 난초 두 분은 그렇게 아침 햇살 머금으며 드디어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 향기만큼이나 어릴 적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생각이 났다. 한문공부를 하면서 할아버지는 나에게 한자의 원리를 이야기해주시곤 하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한자가 바로 난초 란(蘭)자이다. 그 이유는 그 난초를 뜻하는 글자에는 난초가 가진 특성이 매우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艹 풀초 + 門 문문 + 東 동녘동 = 蘭 난초란

이 뜻은 풀은 풀인데 창문 가까이 동쪽에서 비추는 빛을 받아야 사는 풀이라는 뜻이다. 바로 아침 햇살을 비추면 꽃을 피운다는 아주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동쪽의 햇살은 군자의 맑은 정신을 뜻하며 난초는 그런 생명력을 대표하는 식물로 선비들의 묵화로 그려지게 된다. 아침의 햇빛은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지만 매우 온화하며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는 벽사의 의미도 있다. 세 시간 남짓 햇빛이 난초를 비추면 아침이슬을 흘리는 입사귀들이 눈부신 자태를 뽐낸다. 난초를 키우시는 분들은 아마 아침에 보는 난초가 꽃을 피우면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것을 아실 것이다. 나도 오늘 아침 그 기분은 만끽하며 주변 분들께 이 향기를 글로 전하고 있지 아니한가? 매우 행복한 일이다.

나는 난초를 그린 지 올해로 삼십 년이다. 어릴 쩍 잡초같이 그린 난초를 회상하면 웃음이 절로 나지만 그 추억 또한 오늘날 내 난초의 꽃을 피운 하나의 햇살임에 틀림없다. 좌로 그리는데 15년 우로 그리는데 15년 걸린다 하니 올해쯤 꽃을 피우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흥선대원군은 천진으로 유배를 왔을 때 그 분노를 삮이기 위해 난을 그렸고 집안의 조상이신 추사 할아버지는 난이 아닌 난을 그리셔서 선의 경지에 다 달으셨다. 그 유명한 불이선란(不二樿蘭)이 바로 그것이다.

“난초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려냈구나. 문을 닫고 깊이깊이 찾아드니, 이 경지가 바로 유마의 불이선(不二禪)일세.”

“기이(奇異)한 글자를 쓰는 법으로써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

불이선이라함은 내가 인식하는 것도 세상의 인식이요 세상 또한 나의 인식인데 내가 아름답다 하는 것을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은 중요치 않으며 내가 깨달아 행하는 것이 바로 선이며 창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난초 하나에 이런 예술의 혼을 담았으니 수십 년 유배 생활에 얻은 인내의 경지이며 수양의 결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가짜들이 판을 친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가짜는 진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알지 못하는 것은 깨우칠 필요가 있다. 아침에 비추는 햇살에 난초 키우다 보면 그 세월의 정적만큼이나 조용히 피어나는 향기를 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성공은 빨리가 아니라 느림이고 은은함이며 높은 것이 아니라 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데는 조바심이라는 것이 큰 작용을 한다. 물론 흥분 조절을 못하는 사람들이 인내라는 수양을 만나면 건강해지듯이 우리는 사뭇 거친 숨결에서 고요한 음성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교회 다니는 분은 그걸 아멘이라 부르고 절에서는 아미타불 이슬람에서는 인샬라라고 한다. 모두 부족한 우리에게 기다림 만큼 응답을 주길 원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된 주문 일 것이다.

오늘 글을 쓰고 나니 아침해가 중천으로 자리를 옮겨간다. 배꼽시계가 울리기 직전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정판교의 시하나 올려본다.

春雨春風寫妙顔 춘우춘풍사묘안
幽情逸韻落人間 유정일운낙인간
而今究竟無知己 이금구경무지기
打破烏盆更入山 타파오분갱입산

봄 비 봄바람에 신비한 모습 다 해서
그윽한 정 좋은 운 율 인간에게 내렸는데,
지금에 이르도록 진가 아는 이 없으니
화분 깨뜨려 버리고 다시 산에 들어가리라.

어제 북경에 비가 왔다. 오늘은 서울에 비가 오겠지.

2019년 3월 11일 맑은 북경의 아침 햇살 아래 난꽃 향기 맡으며 김기훈 쓰다.

사족 : 난초를 키우다 보니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난초는 죽어요 약간 무심한 듯 주면 잘 자란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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