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치는데도 기술이 있다.

아침에 쓰는 우표 생활 칼럼

by Kimkihoon





어제는 아는 지인의 초대로 베이징에서 제일 큰 연극원에서 연극을 한편 감상했다.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소개해보고자 한다. 안 그래도 그 전날에는 금융 관련 영화인 류준열 주연의 돈이라는 영화를 본 후여서 그 연관성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연극의 주제는 전설적인 사기꾼인 찰스 폰지의 일대기를 그린 내용이다. 찰스 폰지(Charles Ponzi, 1882~1949)는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인 사기꾼이다. 1920년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외국에서 구매한 만국 우편연합 국제 반신권을 미국에서 내다 팔 때의 차익을 이용해서 투자자들에게 45일 내에 50%의 수익률을 그리고 90일 내에 100%의 수익률을 낼 수 있다고 하며 투자금을 모았다. 그러나 이는 신규 투자자들의 투자금을 기존 투자자들에게 지급해주는 사기였다. 일종의 돌려 막기 식의 이 수법을 처음 이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찰스 폰지의 사례가 가장 유명하기 때문에 ‘폰지 사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러한 기법으로 1년 간 투자자들에게 2천만 불의 손해를 입혔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생활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으면 비극적인 그의 말년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에는 충분한 일화이기도 하다. 연극으로 만들어진 소재의 착안이 돋보이기도 하나 현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돈놀이의 모습과도 매우 흡사한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첫 번째 사기의 스승을 만나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폰지는 전전긍긍 생활을 하다. 어느 은행에 엉겁결에 취직을 하게 된다. 거기에서 자신의 사기의 모델이 되는 사람을 만난다.

1907년 몬트리올로 가서 신장개업한 자로시 은행의 직원으로 취직했다. 자로시 은행은 몬트리올에 도착한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주로 이용했다. 이때 폰지는 자로시 은행의 회장 자로시로부터 훗날 사용하는 사기 행각의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그 당시 일반적인 은행 이자율보다 2배 정도였던 6%로 이자를 주었고 은행은 급격히 성장했다. 그러나 폰지는 자로시 은행이 안 좋은 부동산 대출 때문에 재정 위기에 놓였다는 것, 그리고 자로시가 투자금 이익이 아닌 신규 고객의 통장에서 돈을 빼다가 이자를 땜빵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은행은 망했고 자로시는 돈을 많이 챙겨서 멕시코로 도망갔다. 이일로 폰지는 사기 치는 것에 대한 확신을 얻고 사기를 치다 구속이 되고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는 감옥에서 취직을 했다고 또 사기를 친다.

사기행각의 절정

1919년 여름, 보스턴의 스쿨 스트리트 27번지에 자기만의 사무실을 열고 유럽에 있는 몇몇 지인들에게 자기 자신의 광고 사업 아이디어에 대해 편지를 보낸다. 수 주 후 스페인으로부터 광고 카탈로그를 부탁하는 편지를 받았는데 편지봉투 안에 만국 우편연합의 국제 반신권이 있었다. 그런 것을 본 적이 없던 폰지는 의문을 품게 됐고 국제 반신권 제도의 취약점을 알게 됐다. 국제 반신권은 편지를 외국으로 보내고 수신인이 다시 발신인에게 답신을 할 때 추가적인 우편 요금을 면제해주는 것인데 나라 별로 값이 다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구매한 국제 반신권을 미국에서 달러로 바꾸면 차액이 있었다.

그 차액으로 이익을 보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폰지는 통역가 일을 관뒀다. 그 후 국제 반신권을 대량 구매하기 위한 큰돈을 얻으려고 은행들에서 대출을 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후 돈을 모으려고 주식회사를 차린 다음 보스턴의 몇몇 지인들을 방문하여 90일 내에 2배의 이익을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나중에 45일 내 50%의 이익을 내고 3개월 내에 2배의 이익을 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중 몇몇이 투자를 했고 1250불의 투자금을 낸 대가로 750불을 받았다.

사기 행각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위해 1920년 1월 일명 '증권 거래사'를 세웠다. 처음 한 달 동안 18명이 1,800불을 맡겼고 한 달 후 신규 투자자들의 투자금에서 빼낸 돈이 기존 투자자 18명에게 지급됐다. 스쿨 스트리트 나일스 빌딩에 더 큰 사무실을 세웠다. 소문이 퍼져나가고 더 많은 투자자들이 왔다. 불과 1920년 2월에서 3월 한 달 사이 투자액은 5천 불에서 2만 5천 불로 상승했다(오늘날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6만 2천 불에서 30만 9천 불). 폰지는 에이전트를 고용해서 뉴잉글랜드 지방 및 뉴저지주에서 새로운 투자자를 물색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 투자자들은 고액의 돈을 지급받았고 소문은 더 퍼져갔다. 1920년 5월 투자액이 42만 불(오늘날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최대 500만 불)에서 6월에는 250만 불에 이르렀으며(오늘날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3,000만 불) 7월 말엔 하루에 백만 불을 모으는 수준이 됐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수익을 보지 못했음에도 계속 돈을 투자했다. 폰지의 '증권 거래사' 지점은 메인주에서 뉴저지 주에까지 뻗어나갔다.

초기의 투자자들은 주로 저소득층이었지만 소문이 퍼져 상류층도 투자를 시작했다. 심지어 로렌스의 은행가가 1만 불을 맡길 정도였으며 존 콜린스 같은 폰지의 가까운 친구들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투자했다.

호화로운 일상생활

폰지는 렉싱턴에 별장을 구입한 뒤 최고급 차를 샀으며 뉴잉글랜드 지방에 걸쳐 여러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결혼 후 가지 못한 신혼여행을 가고자 했으나 그 대신 여객선 1등석 표를 사서 이탈리아에 있는 모친을 모셔왔다. 폰지의 모친은 폰지 부부와 같이 살다가 곧 세상을 떠났다. 1920년 7월 31일, 폰지는 신부 파스칼레 디 밀라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모친을 기리는 의미로 10만 불을 기부했다. 마카로니 회사를 사들였으며 와인 회사 일부를 사들여 투자자들에게 줄 배당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사기 행각 몰락

보스턴 포스트에 의해 사기 행각이 폭로됐고 그 와중에 폰지는 매사추세츠 주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사기 행각이 드러나게 됐다. 이로 인해 보스턴 포스트는 1921년 공공 서비스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된다. 폰지는 1934년까지 감옥에 수감됐으며 그 후 이탈리아로 추방됐다. 배우자는 보스턴에 남았고 1937년에 이혼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사기 행각을 벌이곤 했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결국 브라질에서 이탈리아 항공사인 알라 리토리아의 에이전트로 취직했으며 그 시절에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말년에는 통역가로 가끔 일하면서 가난에 시달렸다. 1941년에 심장마비가 오기도 하고 그 후에 뇌출혈로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그는 1949년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병원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한 인간의 삶이 이렇게 파란만장할까? 사기를 치는 데는 사람들의 돈에 대한 욕심과 불로소득을 원하는 물질만능주의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연극은 순간의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지금도 어디선가 혹세무민 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은 우리가 깊이 경계하고 욕심을 버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9년 4월 26일 북경에서

! 오늘 폰지에 대한 일화는 위키백과에서 차용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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