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
이 책을 읽으며 누군가에게 채식주의에 대한 편협한 오해를 갖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살짝 들기도 했다.
대부분의 채식주의자들이 그러하듯 나는 냉장고를 채운 고기를 한꺼번에 내버린다든지 가족들의 취향을 무시한 채 식탁을 풀밭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본인의 의지와 건강 상태에 따라 적절한 채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는 주인공의 그러한 강박적 행동이 단지 지독한 채식에 대한 신념 때문이 아님을 서사를 통해 충분히 밝히고 있다.
소설 속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사실은 육식이 폭력적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육식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심리학자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는 탄탄한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육식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매트릭스를 독자들에게 적나라하게 해부해 보여준다.
육류를 먹는 일은
'지극히 정상이며(Nomal),
자연스럽고(Natural),
반드시 필요하다(Necessary)'라는
3N은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에서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에 이르는
모든 착취적인 시스템을 정당화시키는데 이용해 온 논리이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적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
'비가시성'은 현실을 왜곡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공장식 사육장과 도살장의 높은 담 너머로 미쳐가는 동물과 인간의 실태를 고발하는 부분은 차마 읽기 어려울 정도이다.
우리는 동물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3가지 필터를 거친다.
첫째, 대상화. 동물을 생명이 아닌 물건으로 본다.
둘째, 몰개성화. 동물을 추상적으로 본다.
셋째, 이분화.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는 반려동물, 그리고 먹는 식품으로서의 동물로 범주를 가른다.
축산업 관련 수업을 듣다 보면 자본주의가 생명을 기계 혹은 돈으로 둔갑시킨다는 생각이 역력해진다.
돼지든 소든 수컷으로 태어나면 가능한 한 빨리 거세시킨다.
돈이 드는 마취는 어불성설이다. 거세의 이유는 웅취(누린내)와 육질 때문이다.
거세하지 않은 소는 마블링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또 도축 전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이유는 동물에 대한 배려심 보다 결국 '육질'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스트레스를 심하게 경험한 가축은 육질이 엉망이 되어 상품성이 떨어진다(PSE육, DFD육).
최고의 풍미를 맛보기 위해, 최고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 상품으로써 불필요한 부분은 잘려나가고 철저히 통제된다.
자유로운 움직임 불가능한 스톨에서 사육되는 돼지는 몸과 마음의 질병으로 끊임없이 항생제를 투여받는다.
국내 축산 농가 항생제 양은 선진국의 10배 이상이다.
돼지 체내에 축적된 항생제는 고기를 먹는 인간의 몸에 고스란히 쌓인다.
우리가 아플 때 약이 잘 듣지 않는 항생제에 대한 내성도 공장식 축산업에서 파생된 문제 중 하나이다.
나쁜 일은 모르는 게 약이라고 가르치는 문화 속에서 행복한 무지, 자기만족의 극대화, 비인간 동물에 대한 무관심은 확대되고
인간이 지닌 최상의 자질들 - 신념, 공감, 동정심 - 은 황금과 맞바꿀 것을 은밀히 요구당한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육식의 이면에 감춰진 폭력적 메커니즘에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인물을 그려낸다.
소설 밖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저항할 수 있을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존을 위한 '생태적 메커니즘'도 은밀하고 위대하게 펼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치킨에 버금가는 맛있는 채식요리 도전하기.
우유 대신 두유나 오트 등 식물 기반 음료로 입맛 조금씩 바꿔가기.
비인간 동물들과 교제권을 넓혀가며 서로의 다름과 같음을 알아가는 것.
짧은 생을 살아가는 가축에게도 삶이 필요하다.
그저 고통을 견뎌내는 것 이상의.
만약 도살장이 유리벽으로 되어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다.
-비틀즈 전 멤버, 폴 매카트니
우리는 상호 단절된 세계의 고립된 파편들이 아니고
거대한 생명공동체의 한 부분임을 인식할 때
인간 개체보다 훨씬 위대한 힘과 접속된다.
- 멜라니 조이,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