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평생 먹은 목숨들이 명치에 걸려있는 듯 답답해한다.
자기 안에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강한 죄책감을 느끼며 고기를 끊고 채식을 하지만
1부 마지막 장면, 그녀의 손에는 작은 동박새가 거칠게 물어뜯겨 죽어있다.
여전히 폭력성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3부 친언니 인혜의 서사를 통해
영혜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려 왔음을 알 수 있다.
폭력은 마치 방사능 피폭 효과와 같아서 당시의 상황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평생 스스로를 증오하는 고통스러운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아동학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확률이 높아지듯
폭력의 가장 큰 폐해는 피해자 스스로 '폭력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주인공 영혜는 모든 동물에게 무해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가해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폭력성을 갖고 있다.
좀 황당하고 우스운 생각일 수 있으나
마흔에 농학을 배우고 치유농장의 꿈을 갖고 있는 나는
영혜를 정신병동에 가두기보다 치유농장(케어팜)에 보냈다면
해피엔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녀가 사랑하는 꽃과 나무들을 매일 매만지고 교감하며
직접 수확한 열매들을 풍성히 즐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모든 생명이 생명을 취하며 살아가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식물이 생명을 내어주며 끈질기게 자신을 유전하는 전략을 쓰고 있음을
배울 수 있었다면 생의 의지를 다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세계적인 농업 강국 네덜란드에는 1,200여 곳의 다양한 케어팜이 운영되고 있다.
케어팜은 농작물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농장이 아닌
농업과 복지의 결합으로 사회적 약자를 치유하고 돌보는 농장이다.
케어팜의 고객들은 발달장애, 자폐, 우울 등의 정신질환을 갖고 있거나
약물, 알코올 중독자,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청소년,
치매를 앓는 노인까지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조예원의 <네덜란드 케어팜을 가다>를 보면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는 케어팜의 현장을 볼 수 있다.
린덴호프 오픈가든의 관리자는 35년 동안 약물 중독자이자 딜러로 살아오다가
10년 전 이 케어팜을 통해 완전히 회복되어서 이제는 환자가 아닌 농장의 관리자가 되었다.
일반인보다 중독자들의 특성을 잘 알기에 더욱 최적화된 관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케어팜의 또 다른 효과는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데 있다.
파라다이스 농장에서는 서로 보완할 수 있는 고객들이 어울려 일한다.
가벼운 발달장애인과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 함께 일하며
우울증을 가진 사람은 발달장애인의 신체활동을 도울 수 있고
발달장애가 있는 사람은 의욕도 말도 없는 우울증이 있는 사람과
어울리는 과정을 통해 각자의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다.
식물,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동물과의 관계성도
심신을 치료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자폐증 환자에게는 말이나 개, 우울증 환자에게는 돼지나 닭,
ADHD 증상에는 소를 돌보는 동물매개치료(animal assisted therapy, AAT) 또한 상당히 효과적이다.
인간과 동물의 자연스러운 상호 교감(HAB, Human animal bond)은 스트레스, 혈압 수치,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키는 반면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또한 뇌졸중, 알레르기를 예방하고 면역력관 감수성을 발달시키는 등 다양한 이점이 있어 HAB를 이용한 동물매개치료프로그램이 환자의 심리적 치료나 재활을 돕는 데 효과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도 그렇지만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오만하고 경박한 폭력성은 전 지구적 기후 위기를 유인했다.
건강하고 상호보완적인 관계의 회복에는 '책임감'이 요구된다.
나는 누군가를 향한 '사랑'보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책임감'이야말로
인간답게 살아내게 하는 동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임감은 '책임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