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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퓨처에이전트 Mar 23. 2020

어리다고 무시한 대가는 꽤나 컸다

1인지식기업가로 산다는 것

 1998년 구정 연휴가 지나자마자 1월 말 아니면 2월 초쯤 부모님은 부산 서면 롯데백화점 건너편 영광도서쪽 먹자골목 어느 건물 2층에 프랜차이즈식당 명동칼국수를 오픈하셨다. 그러나 6개월도 못 가서 IMF사태가 터지면서 식당은 망했고 투자금과 각종 위약금 등으로 부모님은 많은 빚을 지게 되셨다.


 당시 나는 부산대학교 무역학과에 합격해 98학번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그렇게 우리 집은 바닥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명동칼국수는 웬만하면 내 돈 주고 먹으러 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나서인지 요즘은 가끔 가서 먹으면 맛은 있다^^


 사실 아버지는 당시 국민은행 지점장이셨고 정년도 아직 한참 남아 있었지만 지인의 소개로 노후준비 겸 명동칼국수를 오픈하게 되었다. 하지만 1997년 대한민국은 외환위기로 IMF금융구제지원을 신청했고 가게를 오픈한 직후 1998년 한국은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의 터널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아는 사람이 무섭다는 말은 진리였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귀가 얇았고 사기도 여러 번 당했던 경험의 소유자다. 늘 그런 일로 어머니와 싸우곤 했는데 제대로 터지고 만 것이다.  


 당시 기억을 떠올려 보면 직장인들은 절약한다고 도시락을 싸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회식도 줄어든데다 2층에 식당을 오픈하는 바람에 내점고객은 급격히 줄어 들었다.

 그래도 인근에 있던 중학교 씨름부 학생들이 가끔 와서 매상을 올려 줬지만 오히려 그게 화근이었다. 당시 프랜차이즈 명동칼국수는 공기밥, 칼국수 사리가 무한리필이었고 그 녀석들이 왔다 가면 그날 장사는 접어야 했다.

 그래도 대학입학 전이었던 내가 서빙도 하고 주방장 휴가때는 직접 칼국수도 삶으면서 인건비라도 줄여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6개월을 못 버티고 가게는 문을 닫고 말았다. 참고로 원래 내 꿈은 어릴 때부터 요리사였다. 부모님의 강한 반대로 조리학과로 진학하진 못했지만 지금도 요리는 곧잘 한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당시 은행 지점장이었던 아버지는 1997년 이미 국가 부도의 상황에서 굳이 왜 가게를 창업하셨던 걸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은행을 다닌다고 금융과 경제를 잘 알고 투자를 잘 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아마도 세상 돌아가는 상황보다는 노후 준비라는 바로 앞만 바라보다가 남의 말에 꼬인 것 같다. 


 게다가 가게를 오픈하기 전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신문보는 걸 좋아했고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작은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른게 아니라 막 가맹점을 모집하고 있었던 프랜차이즈 우동전문점 중에 '장우동'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기사였다. 그리고 부모님이 명동칼국수를 한다 만다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지나가는 말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장우동이라고 있는데 우동, 떡볶이, 김밥, 돈까스 등이 메뉴라서 부산대 앞에 하면 잘 될 것 같은데.... 칼국수는 날씨 영향도 많이 받을 것 같고(이상하게 칼국수는 비오는날 땡긴다)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데, 분식은 날씨 영향도 안 받고 경기 어려워도 용돈타서 쓰는 청소년이 주고객이라 괜찮을 것 같은데..."


 당시 내가 학생이었지만 신문을 자주 본 이유가 있었다. 1997년 고3때 나는 우연히 형 책상에 있던 미래학자 앨빈토플러의 '제3의 물결' '권력이동' 이란 책을 보고 미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미래학자들은 늘 세상의 흐름을 읽기 위해서 신문을 열심히 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당시 대기업에 다니고 계셨고 나중에 일본 회사로 스카웃되신 막내삼촌도 항상 하셨던 말씀이 신문을 보라는 것이었다.


 당시 부산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이 주말이나 시험 끝나면 종종 놀러가던 곳이 부산대학교 앞 상권이었다. 그래서 거기다 신개념 분식전문점을 하면 잘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린 거였다. 그러나 나에게 돌아온 말은 이랬다.


"니가 뭘 안다고...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해~~"


 그렇게 부모님은 결국 서면에 칼국수집을 오픈했고 얼마 후 부산대학교에 입학을 해 보니 역시나 비슷한 시기에 누군가가 장우동을 오픈했다. 그리고 IMF는 터졌고 우리 가게는 망했지만 장우동은 1호점, 2호점...분점을 늘려가면서 불황 속에서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학교다니면서 장우동에 친구들이랑 밥먹으러 갈 때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생각나는가? 장우동, 용우동, 원우동...한때 대한민국의 식당은 전부 우동전문점이었다^^ 물론 지금은 살아남은 게 거의 없지만...그래도 그때 내말 들었으면 한몫 단단히 챙겼을 지도 모른다. 세상을 보는 눈은 나이가 많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평생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에게 생기는 것이다. 이 시대의 수많은 꼰대들도 꼭 명심하길 바란다.



   원래도 부모님 말을 잘 안 듣는 고집있는 성격이었지만 이 일 이후로 부모님의 의사결정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이후로 내 미래를 위한 의사결정은 줄곧 혼자서 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훨더 많은 공부를 필요로 했고 평생학습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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