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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퓨처에이전트 Mar 31. 2020

소중한 기회는 그렇게 다 날아갔다

1인지식기업가로 산다는 것

 2005년 12월 추운 겨울 취업에 성공한 나는 서울 봉천동의 작은 고시원에 자리를 잡았고 창문도 없는 좁은 공간이었지만 흙수저 부산 촌놈 서울의 겨울을 나기에는 충분한 곳이었다. 1년 전 2004년 12월엔 편의점 운영한다고 창고에 누워 있었고 1년이 지난 뒤에는 조금은 나을 지도 모르는 고시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당시 합격한 식품회사에서 발령받은 곳은 구로의 한 영업지점이었다.


 몇 주간은 신입사원 OT를 위해 대리점에서 실습을 했는데 봉천동에서 부천까지 새벽 일찍 출근해 대리점 영업차량을 타고 다니며 시장과 슈퍼 곳곳에서 물건을 나르고 진열상품을 관리하며 현장의 분위기를 익혀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지점으로 출근을 시작했고 선배들을 따라 다니며 식품영업 노하우를 전수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업 노하우보단 실적을 낼 수 있는 편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영업이라는게 매달 실적압박에 시달리는 일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했다. 쉽지 않은 일이라고 느껴 졌지만 어차피 취업활동시 1차 희망직무는 모두 영업을 선택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내가 영업을 무조건 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사무실에서만 일하며 세상물정도 모르고 살았던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실물경제 가까이에서 세상을 읽고자 한 것도 있었고, 경영 공부를 하면서 수많은 경영자들의 조언 중 현장을 알아야 한다는 말에 언젠가는 CEO가 되겠다는 꿈을 꾸며 미래를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던 것도 있다.

  그렇게 영업업무를 조금씩 알아갈 즈음 지점 직원 한명이 퇴사를 하면서 신입인 내가 거래처 10여 곳을 맡게 되었다. 두려웠다. 단독영업이라니...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하지만 대학시절 그래도 나름의 실무경험을 해본 터라 자신은 있었다. 그리고 축구대회 스폰서영업을 할 때도 그랬고 편의점에서 고객영업을 할 때도 항상 진정성있게 다가갔을 때 고객들을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이미 경험한 상태였다.


 하지만 인수받은 거래처들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선배들의 무성의한 영업으로  우리 회사에 대한 이미지는 바닥이었고 얼마 안 되는 기간에 영업사원이 여러 번 바뀐 상태였다. 처음에 인사하러 갔을 때는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영업사원인 내가 아니라 회사 자체를 상대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 아닌가? 두려울 게 없었다. 일단 다시 잘 하겠다는 나의 진정성을 보여줘야 했다.

 만나 주지 않아도 1주일에 한 번은 꼭 찾아갔고 창고의 물건도 직접 꺼내서 진열하고 양복입고 진열상품 먼지도 털고 일단 거래처 사장님들이 아닌 직원들에게 진정성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이 먼저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주기 시작했고 일부 매장에서는 고생하는 내가 안 되어 보였는지 가끔 밥도 주시곤 했다.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거래처가  빠꿈이 사장님이라 상대하기 어려웠는데 어느 날 직원 한 분이 내일 아침 일찍 야채, 과일 등이 들어오는데 그때 와서 도와드리면 사장님이 만나주실 지도 모른다며 귀뜸을 해 주었다. 그래서 다음 날 양복을 입은 채 팔을 걷어 부치고 물건을 함께 날랐고 그날 사장님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리고 밀린 대금 결제도 일부 해 주시면서 지켜 보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그렇게 한 곳이 해결되니 다른 곳들도 하나씩 마음을 열어 주셨고 모두 회사가 아닌 나라는 사람을 인정해 주시기 시작했다. 드디어 영업에 재미을 붙이고 실적도 조금씩 늘어 회사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해당 식품회사입사한 이유는 부모님이 반대하긴 했지만 어릴 적 꿈이 요리사였기에 식품에 대한 관심이 많기도 했고 또 하나는 회사 내에 일본 법인이 있어서 대학시절 공부한 일본어를 활용해 국제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과의 비즈니스 일을 하고 계셨던 막내 삼촌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삼촌같은 국제 비즈니스맨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영업지점에서 이제 막 영업을 익혀가고 있을 때쯤 본사 회의를 다녀 온 선 내가 일본 법인으로 발령날 것 같다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다.


 시간이 지나 내가 일본법인으로 가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 갈 때쯤 갑자기 지점 직원 한명이 또 퇴사를 하면서 인력을 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고 결국 나의 일본법인 발령기회는 다른 직원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선배들은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라며 위로를 했지만 해외 법인은 TO가 나기 매우 어려운 곳이고 언제 또 그런 기회가 올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마음은 붕 떠 버렸고 그때부터 실망감에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으며 안 그래도 최악의 거래처를 이어 받아 맘고생도 많이 한데다 내가 생각했던 회사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조직문화에 실망도 했었고 그즈음 같은 사무실을 사용하던 바로 옆 지점에서 상사의 부하직원에 대한 폭행사건까지 일어나면서 내 마음도 모두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어느 날부터 나는 퇴근 후 채용사이트를 보기 시작했고 어느 분야로 갈 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매일 읽고 있던 경제신문 한 켠에서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부가가치를 비교해 놓은 특집기사를 보게 되었다. 례는 컴퓨터 마우스 제조사와 유통하는 전자제품매장으로 결론은 제조사가 벌어들이는 돈은 얼마 안 되지만 서비스 부가가치는 매우 높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보 고등학교때 읽었던 미래학자 앨빈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리고 미래는 서비스업의 시대가 될 거라고 예측했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고 그때 결정했다. 식품제조기업을 경험했으니 그렇다면 나도 좀 더 부가가치가 높고 미래전망도 좋은 유통서비스업으로 가야겠다고 말이다.


 마침 편의점 운영경험도 있었고 일본어 자격도 있었기에 채용공고 중 (주)보광훼미리마트(현 BGF리테일 CU편의점)라는 회사가 눈에 띄었고 바로 이력서를 집어 넣었다. 당시 편의점은 일본을 많이 벤치마킹하는 사업이라 일본어가 우대되는 시절이었다. 얼마 뒤 서류가 통과되고 면접일정이 잡혀 다니던 회사에는 연차를 내고 (주)보광훼미리마트 면접을 보았고 결국 최종합격해 이직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직한 회사에서 발령받은 곳은 내 고향 부산도 아니고 한 번 가 본 적도 없었던 경남 마산이었다. 발령 받는 순간 내 머릿 속은 '어떻게 또 서울을 올라가나?' 이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기대했던 나의 서울 생활은 결국 6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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