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을 가르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어디에 서 있는가를 기준으로 사용합니다. 원을 그려 경계를 설정하고 그 안에 들어오면 내 편, 밖에 있으면 다른 편으로 나누는 방법입니다. 둘째 어디를 향하는가를 기준으로 사용합니다. 최종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곳이 같다면 같은 편으로 여기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종종 첫째 방법으로 편을 나눕니다. 사람에 따라 원을 좁게 그리는 사람도 있고, 넓게 그리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자신이 그린 원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나와는 다르다고, 나아가 그 사람은 틀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선명성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원을 작게 그립니다. 물론 아닌 건 아니라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편을 나눌 경우 끊임없이 새로운 원이 그려지고 계속해서 편이 나누어집니다.
둘째 방법으로 편을 나누면 때로 불편합니다. 사람마다 출발점이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릅니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편하게 여기는 성향이 있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과 어울리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론 무조건 용납할 필요는 없습니다.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서로 간의 차이나 작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같은 편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박근혜의 최대 공적은 96%의 국민의 화합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이 같은 기사를 내고 있습니다. 채널A와 JTBC 모두 촛불집회를 중계합니다. 어느 대통령도 이루지 못한 '좌우 화합'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큰 흐름에도 불구하고 작은 불일치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일례가 '수취인 분명'의 가사로 인한 여혐 논란입니다. 여혐 가사가 아니라는 사람도 있고, 교조주의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적의 적은 친구가 아니라 별개의 개새끼라는 사람도 있고, 디제이덕이 촛불집회 무대에 서는 것조차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나와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들과는 마음 편한 동행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모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촛불 집회에서 한 마음으로 박근혜 퇴진을 외쳐도 다른 장소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디제이덕의 이야기를 다시 합니다. 그들은 세련되지 않았습니다. '미아리 복스' 나 잦은 폭행 사건을 보면 그들은 '못 배운' 티를 냅니다. 개인적으로 별로 알고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번 노래의 가사에도 분명 듣는 사람이 불편해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무대에 서지 않게 된 일은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영영 같이 가지 못할 사람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무대에 서지 않게 된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지금은 다르지만 그래도 한 방향을 바라보는구나 인정하게 됩니다.
이대 사태와 최순실과 정유라로부터 시작한 흐름은 박근혜 탄핵으로 이어집니다. 촛불집회 참석자 기록은 매번 경신됩니다. 물론 각자 상황인식도 다르고 처방도 다릅니다. 진보도 있고 보수도 있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시각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묶는 목표는 '상식의 회복'이라 생각됩니다. 노력하는 사람이 대가를 받고, 나쁜 일 저지르면 벌을 받는 그런 상식의 회복이 서로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목소리로 박근혜의 퇴진을 외치게 만듭니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다른 점은 용납할 수 있습니다. 틀린 점이 있다면 틀림을 지적하고 고치고 나서 같이 갈 수 있습니다. 모두가 바라는 상식의 회복은 서로에 대한 배려도 포함됩니다. 잘못된 말을 무심히 사용하던 이들의 잘못을 지적할 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 모습 또한 상식적인 사회의 모습입니다. 누가 아나요. 지금은 다른 곳에 서 있더라도, 같은 곳을 보며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될지요. 그러면 그때부터 같이 동행할 수도 있잖아요.
요즘 모두 날이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하지만 서로 어디에 서 있는가 예민하게 살펴보기보다 같이 바라보는 그곳을 향해 같이 나아간다면, 우리는 더 즐거운 마음으로 같이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