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Nov 05. 2020

결정적인 순간에 머무른다는 것

글은 아래 오디오북으로 시청하시거나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1988년 캐나다 벤 존슨은 서울 올림픽 육상 100미터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난 그 결정적인 순간에 올림픽 주경기장 3층 부근에 앉아 있었다. 문득 그날의 열기로 돌아가곤 하는데, 가득한 들뜸,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 귀를 찌르는 환호성들이 아직도 내 어깨를 들썩거리게 만들곤 한다.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머무른다는 것, 그 순간에서 함께 고함을 지르고 아주 높은 감정에 동시에 도달한다는 것, 그래서 어떤 감각들은 아예 잊힌다는 것, 오직 하나의 사실만 더 부각되고 그 순간에 내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 나는 거의 완벽한 순간에 도달한 것 같았다. 내인생의 최고조, 무력감의 상실, 안절부절함의 미약함, 열광의 끝에 거의 다다른 것 같았다.


나는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 부표처럼 떠나니고 있었다. 그리고 시끄럽게 떠오르다, 잠시 망설이곤 다시 모양 없이 사람들에게 밀려 어디론가에 당도하곤 했다. 그때는 무엇이든 많았던 것 같다. 사람이든, 호주머니 속의 티켓과 동전 몇 개든, 어쩌면 인생의 남은 시간이든, 무엇이든 계속 풍족할 것만 같았다.


벤 존슨이 종이테이프를 가까스로 끊었을 때, 나는 주경기장 3층 위에서도 그의 울분과 환희를 분명히 지켜봤다. 그는 기뻐서 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3층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관중 들의 소리에 묻혀도 그의 비명은 차분하게 오래도록 경기장안을 돌아다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떤 감격, 아니 착란 상태일지도 모르는 감정에 빠졌다. 시인들은 광기를 넘어서 가끔 원인 불능의 착란 상태에 빠진다고 한다. 시를 쓰기 위해 나아가 세상을 예지하기 위해 선지자 같은 역할을 착란 상태에서 맡았다고 한다.


나는 88년, 올림픽 주경기장, 3층을 생각하면 어느 순간, 그날의 감정에 도취되어 감정의 경기를 일으키고 만다. 그 감정은 시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에 격앙된 감정이 착상된 상태와 같다. 모든 감정을 잃어서, 하나의 감정이라도 찾으려고 광기에 휘말리려는 예술가들과 악마의 값싼 흥정과 유사하다고 할까.


그것은 일상을 교란시키는 형태였다. 환호와 비명을 가로지르는 아니 뒤섞어버리는 여름과 가을의 어색한 만남 같은 것이었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그날의 격앙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뒤끓는 소음의 기억 속에서도 나는 왜 아쉽게 움츠려드는지, 나는 왜 점점 세상에 희석되고 마는지, 분명히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갑자기 차갑게 식어버리는지, 내 감정의 높낮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벤 존슨의 금메달은 약물복용 탓에 박탈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의 내 흥분도, 환호성도 함께 환상으로 취급됐다. 감정의 대량 환불 사태가 주경기장에서 그리고 바깥에서 연이어 터져버렸다. 실망, 좌절, 포기, 이물감 같은 불편함들이 한꺼번에 폭주하다 허물어지고 말았다.


취소, 불신, 실격과 같은 단어는 남은 시간을 줄기차게 괴롭힌다. 가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나는 벤 존슨의 마지막 가을, 그러니까 마지막 환희를 떠올린다. 나는 그래서 환호성이 어색하다. 갑자기 추락할까 봐, 또 난데없는 거짓말과 속임수가 그 환희를 무용하게 끌어내릴까 봐,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어제는 플라타너스 잎들이 수북하게 쌓인 길을 걸었다. 초록색이 여전했지만, 노랗게 생을 다한 이파리들, 어쩌면 내 손바닥과 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마지막 손바닥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내 발목을 붙잡는 것 같았다. 그래, 그들에게도 환호성을 지르던 순간이 있었겠지. 그들도 나처럼 88년도, 올림픽 100미터 결승점이 존재했었겠지. 우리는 같은 배를 탔지만, 내려야 할 지점이 다른 삶을 열심히 살았을 뿐이겠지.


누구를 탓할까. 88년을 원망하랴. 올림픽 경기장, 인생에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감격을 선물한 아버지를 원망하랴. 그 감격을 몰락시킨 벤 존슨을 원망하랴. 누구를 원망한다고 지금의 인생이 달라질까. 그러니 길가에 영원히 잠든 플라타너스 잎도, 그날 100미터 끝 지점을 잃어가는 나의 기억도, 가을의 마지막 흐름도 불행한 것이라고 원망할 필요는 없으리라.




글쓰기와 독서에 관한 정보 교류 & 소통하기

글 공유 책에서 읽은 문장 공유

커뮤니티에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 소식 공지

- 특강 소식 공지

- 글쓰기 및 독서 모임 할인 코드 제공



참가 → https://open.kakao.com/o/g0KsCKkc



매일 쓰는 것이 목적

- 자주 쓰는 습관 기르기

- 홍보에 제한 없음

- 누구나 자신의 글 바닥 홍보 가능

- 내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실컷 자랑질 하기



참가 → https://open.kakao.com/o/g6pnVqoc


공대생의 심야서재 커뮤니티 카페

https://cafe.naver.com/wordmastre


매거진의 이전글 내 안엔 블랙홀이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