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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Nov 25. 2020

이런 몹쓸 직업병 같으니라고!

낯설고 불길한 예감 탓에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다.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이 머리를 상쾌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기발한 아이디어면 좋겠지만, 그런 감각적인 경험이 출근 버스에서 나올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이런, 아뿔싸 또 지나쳐버리고 말았네"라고 크게 체념을 하고 그 거품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곧 긍정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오늘 아침도 버스 한 정거장을 지나쳐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온갖 비극 중에서도 지극히 가벼우며, 그냥 머리를 긁적이게 만드는 흔하디 흔한 찰나의 불행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그 순간 나는 꽤 심각하게 불행해진 것 같았다. 그 비극이란 것은 내가 지금까지 거쳐온 온갖 형태의 비극을 모방한 것일 뿐이겠지만, 지극히 평범한 것으로 치부할 만큼의 무게로 취급되기는 곤란했다. 나는 그런 낮고 사소한 비극을 맞이하면서도 오이디푸스가 범한 보잘것없는 실수가 그를 극단의 파국으로 몰아갔던 극적 구조처럼 나의 판단도 혹시 그러한 상황으로 서사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우려스러운 감정에 빠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악조건 따위는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고쳐먹고 "10 정거장 지나쳐서 내리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려 보는 것이다.


그래도 감각은 여전했던 것 같았다. 그게 제법 일관성 있게 작동한다고 할까. 나는 변화를 아주 쉽게 간파하는 편이다. "이 산이 아닌가 봅니다"와 같은 발언처럼, 군대 시절 엉뚱한 고지에 오르고 말았을 때, 그 어느 누구보다 잘못된 점을 확신하고 "지금 당장 하산하고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라고 그 세상에서 제일 멍청했던 갓 임관한 소위에게 긴급하게 소신 발언을 했던 것처럼, 나는 무언가 잘못된 것으로 흘러갈 때 그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행동하는 편이다.



나는 지각생처럼 부리나케 버스 뒷문을 통과하며 사무실에 안착한 내 안정스러운 정경을 상상했으나, 금세 나는 또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래, 기껏 한 정거장 지나친 건데 뭐가 대수야. 그냥 천천히 가자고, 게다가 넌 변화를 또 금방 인지했잖아. 그거 대단한 거야, 아주 잘했어"라고 나의 뒤늦은 결단을 축하하곤, 난처한 표정을 애써 주머니 속에 꾹꾹 눌러둔 채, 보폭을 줄여버렸다.


나는 그러면서 "오늘은 왠지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렸는걸",이라고 놀라고 말았다. 도대체 야탑역에서 차그룹 컨소시엄까지 5분 만에 왔다는 게 말이 돼?라고 다시 중얼거려보지만, 내 소리가 당도할 곳은 없었다. "음, 오늘은 완벽하게 하루키 씨의 세계에 몰입했구먼". 20분을 날려먹은 게 아니라 20분을 꽤 유익하게 보냈음을 경탄해 마지않으며, 나를 위해 축배라도 들어보는 것이다.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올 때는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고개를 숙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곳이 전혀 익숙하지 않다면, 뭔가 잘못된 방향 쪽으로 근접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그럴 때는 빨리 중단해야 한다. 오늘 아침, 내려야 할 곳에 미처 내리지 못했을 때, 문득 내가 가야 할 곳이 아닌 이상한 곳으로 자꾸만 진전하고 있을 때, 그럴 순간에는 결단이 필요하다. 결단은 신속할수록 좋다.


가끔은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렸으면,이라고 소원을 빌어보지만 좀체 어느 일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는 나날을 매일 보내고 있으니 나는 어떤 일이든 쉽게 포기를 하고 마는데, 오늘 아침은 어쩐지 꽤나 진중하게 글에 빠져들었다고 할까?


그런 걸 보면 독서는 우리의 시간을 앗아가는 존재인 것 같다. 특히 하루키 씨의 문장은 더욱더! 독서의 긍정적인 강탈 앞에서 나는 빼앗긴 기분보다는 되려 되찾은 기분이 드니 이거 역시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상황이 아닌가. 버스에 긴급하게 내리면서도 나는 조급하지 않게 살기로 한 사람이라는 명제를 되새기고, 오늘도 내 속도로 살아야겠다는 결론을 다시 찾았다.


나는 차분하게 걸었다. 그러면서도 멀리 보이는 교차로의 동작 체계를 계산하며 왼쪽으로 먼저 건널까, 오른쪽으로 건널 것인가, 어느 쪽이 더 빠르고 효과적일까 궁리했다. "역시 어쩔 수 없는 노릇이군, 시간을 단축한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이제 기록 단축 따위는 의미 없는 나이가 됐잖아"라고 나에게 따지듯 되묻고 말았지만.


신호등을 기다리며 나는 주위 사람들의 특질을 살폈다. 두꺼운 패딩을 걸쳐 입고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이면서도 손이 시려 연신 그것을 비비는 여자, 다음 초록색을 기다리지 못해 결국 무단 횡단을 감행하고야 마는 남자와 여자의 용기도 보였다. 나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람처럼 매섭게 서서, 길가에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여자를 경멸의 눈초리로 쏘아보다가, 마치 무예라도 펼치듯 자동차 사이를 용케 활보하는 어리석은 남자와 여자의 무모함에도 역시 경멸을 쏘아붙였다.


아, 또다시 나의 직업적인 버릇이 도진 건가. 나는 그들의 행위를 꼭 기억했다가, 글로 만들어야겠다고, "이 기억을 절대 잊으면 안 돼",라고 그 상황이 멋진 단편 소설로 탄생할 것처럼 중얼거리는 걸 보면, 나는 영원히 직업병에서 벗어나질 못한다는 반증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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