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쓰고 싶은데요 그렇게 되려면 신나는 글쓰기를 당장 신청하면 될까요?”
“'와, 물론입니다. 환영합니다. 지금 바로 신청하세요.'라고 제가 말할 줄 알았죠? 모임에만 들어가면 글이 잘 써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 판단은 지금 바로 마음속에서 깨끗하게 비워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좋은 글을 쓰겠다는 생각이 첫 번째로 틀렸고 모임에 참여하면 자동적으로 글을 잘 쓰게 될 거라는 생각이 두 번째로 틀렸거든요.”
“아니, 선생님 그렇게 장사(?) 해도 되나요? 모임 운영하시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오겠어요?”
“뭐 많이 오면 좋긴 하겠죠 하지만, 신청하지 않아도 딱히 문제 될 건 없어요. 저야 모임이 잘 되든 그렇지 않든 그럭저럭 먹고 살아갈 것이고, 어떤 이유든 만들어서라도 꾸준하게 글을 쓰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이곳 브런치도 있고 만만한 블로그도 있잖아요. 쓸 공간은 어디에나 있고 쓸 이야기는 주변에 넘치죠. 그러니까 모임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글을 쓰게 될 확률은 99%에 근접하게 될 겁니다. 좋은 글이라는 결과적인 양태나 지극히 개인적인 선호도나 특정한 기준을 떠나서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 글의 요건은 무엇일까요? 선생님만의 철학을 듣고 싶어요.”
“음. 좋은 글의 요건, 그게 뭘까요? 저도 오랫동안 그걸 찾고 있거든요. 오래도록 글을 써오곤 있는데 이론적으로든 경험적으로든 알듯 말듯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게 좋은 글의 요건 같아요. 그러니 아무리 몸과 마음을 동시에 마법처럼 부려봐도 좋은 글의 요건이 과연 무엇일까, 대답하기 참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도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글을 쓰려면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아는 범위 내에서 말씀을 드려 볼게요”
“첫 번째로, 저는 자세에서 좋은 글의 요건을 찾고 싶어요. 우리는 어떤 마음의 발로가 일어나 글을 쓰게 되겠죠. 그러니까 쓰기 전과 후로 어느 순간 삶이 급격하게 기울어져 버리는 거예요. 굉장한 전환점을 맞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 무게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냐는 거예요. 실로 한순간에 스쳐가버리는 한여름 대낮, 나무 밑의 그늘 같은? 그런 취급을 하는 게 아니냐는 거죠. 옷깃에 스며들었다, 떠나가 버리는 찰나의 시원한 바람으로 글을 대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는 그래서 판단을 잘 해야 합니다. 어떤 자세가 그동안 잘 맞춘 균형의 추를 무너뜨릴지도 모르는데, 다시 제자리를 돌아갈 수도 없는데 과연 그걸 감당할 수 있냐고요. 그걸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왜 글을 쓰는지, 과거 어떤 자세가 글을 쓰게 촉발시켰으며 현재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처음의 순수한 자세에서 비켜나서 다소 삐딱한 시선 그러니까 위태롭고 흔들리는 자세로 내 몸과 마음이 각자 다른 길로 가버리거나, 혹은 다른 그 무엇으로 변신한 건 아닌지 나를 돌아보라는 얘기예요. 여러분의 발밑을 한 번 관찰해봐요. 밑에 뭐가 있죠?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있나요? 진흙이 있나요? 아님 강물 위에 둥둥 떠 있나요? 지금 찾은 안정적인 자세를 계속 고집할 것인지 아니라면 위험한 쪽으로 기울어질 것인지 시도 혹은 결정의 문제라는 거예요. 구부정하게 생각하거나 무성의하게 글을 쓰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얘기예요. 그런 마음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기 힘들다고요? 그건 원래 그래요. 그런 마음의 자세는 매일 스마트폰 배터리 충전하듯 채워야 하는 일이거든요. 단 하루라도 방치하면 닳아빠지고 말겠죠. 충전하는 방법요? 그건 이미 알고 계세요. 바로 쓰는 거예요.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마음이 다시 자세를 바로잡아주는 겁니다. 혹시나 처음에 잡은 그 자세를 잃어버렸다면 그 얘긴 당신이 꾸준하게 글을 쓰지 않았다는 증거예요.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잖아요. 자세를 잃었다면 그 누구도 원망할 이유가 없어요. 그냥 소파가 더 편했고 잠자기에 침대가 요긴했을 따름이에요. 글쓰기는 정교하고 단단하며 빈틈없는 자세를 필요로 하니까요. 여러분의 희생을 먹고 자라는 게 바로 글쓰기니까요.”
“두 번째로, 좋은 글의 요건으로 저는 연결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간혹 모임에서 글감으로 첫 문장을 제시하는 편이에요. 다들 첫 문장에 고충을 토로하는 편이라서요. 그래서 첫 문장을 고심 끝에 제공해드립니다. 첫 문장만 쓰면 그다음 문장이 술술 써질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죠. 그런데 역시 잘 안되죠. 첫 문장이 해결되면 그다음 문장이 또 고충을 만드니까요. 그러니까 이것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비밀의 문 뒤쪽의 일과 비슷해요. 문 하나를 겨우 열면 그다음 문이 또 나타나는 거죠. 겨우겨우 비밀을 풀면 또 다른 문이 대기하고 있고요. 숙제는 계속 나타나는 겁니다. 해결할 일들은 세상에 숱하게 있죠.”
“지금 연결을 이야기하면서 왜 비밀을 이야기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문을 언급하냐고요? 바로 연결이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것은 김정선 작가가 이야기했듯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위에서 아래로 써 내려가면 되는 일이거든요. 그 간단한 일을 어떤 사람은 해내고 어떤 사람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하죠.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쉬운 일이기도 해요. 왜 그런지 궁금하죠? 어떻게 문장에 다른 문장을 이어붙일지 궁금하죠?”
“연결의 원리, 원리에 숨은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연결은 맥락을 의미하죠. 맥락의 뜻이 뭔가요? 사전을 찾아보니 ‘사물 따위가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이라고 나오네요. 네, 맥락과 연결은 거의 같은 뜻을 가지고 있어요. 한 가지 비유를 통해서 연결을 설명해볼게요.”
“자, 당신은 누군가의 집에 방문하게 됩니다. 낯선 이의 집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 집에 들어가려면 문을 거쳐가야 하겠죠. 자 출발은 당신의 눈앞에 있는 바로 그 문입니다. 어떤 장면 그러니까 문 하나가 당신 앞에 서 있는 광경을 한 번 마음속에서 떠올려보세요. 그림을 그리듯 사각형을 묘사해보는 겁니다. 단순하게 '문을 열었다.'라고 보통 사람은 글을 쓰겠죠. 거기까지 누구나 한 문장을 쓰게 될 겁니다. 자 그런데, 그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문 뒤에는 누가 있고, 문을 열기까지 나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품고 있었을까요? 연결이라는 건,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한 장면과 장면에 놓인 사물과 사람을 앞뒤로 이어붙이는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저라면 이렇게 표현을 해서 한 문장을 길게 쓸 겁니다.”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관목 수풀 사이를 돌아 이름 모를 잡초들이 끝없이 이어진 길 끝에 그 집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 몇 개를 밟고 문 앞에 당도했다. 문을 열까, 말까 고심하다, 손잡이에 조심스럽게 손을 댔다. 오른쪽으로 가만히 돌리니 삐거덕 소리를 내며 스르르 문이 열렸다. 안쪽은 온통 검은 세계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오른발을 앞으로 딛고 그 무게감을 느끼며 나머지 왼발을 마저 옮겼다. 바깥에만 존재하던 빛이 안쪽에까지 스몄다. 침을 꼴깍 삼키고 완전히 안쪽으로 들어섰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야가 눈에 들어오자 가만히 다시 문을 닫았다.”
“아무렇게나 글을 써봤어요. ‘문을 열었다’ 이 장면 하나를 다른 장면과 연결한 거죠. 문을 열기 전의 상황, 문을 연 이후의 상황이 존재하겠죠. 그 상황을 상상하며 그냥 포착한 겁니다. 하지만 연결하더라도 맥락이 중요하겠죠. 연상된 하나의 장면과 나머지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렇게 하는 건 물론 상상력과 맥락이겠죠. 하지만 단순하게는 앞뒤에 배치하는 기교적인 장치가 전부예요. 누구나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하나의 문장을 써놓고 그다음 장면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고민이 들 때는 문장 끝에 무엇이 오게 할 것인가,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문은 집 안쪽을 떠올리게 할 것이고 문 안쪽에는 어둠이나 빛이 있을 것이고, 또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겠죠. 물론 이런 상상만 연결이 가능한 건 아닙니다. 논리적인 글이 됐든, 감성적인 에세이가 됐든 앞의 문장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어떻게 글을 전개할 것인가, 거리가 너무 지나치게 떨어진 건 아닐까, 적당한 팽팽함을 유지하면서도 끌어당기고 미는 힘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그런 문제만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글이 상당히 길어지고 있는데요.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좋은 글의 요건은 독서입니다. 글 쓰는 사람치고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죠. 그런데 단순하게 독서만 한다고 글이 잘 써지는 건 아니거든요. 백 번 코딩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과 한 번 코딩하는 게 다른 것처럼요. 독서도 표적을 세우고 하는 게 중요한데요. 그게 의외로 의식하지 않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무의식적으로 길러지는 게 문장력이니까요. 그러니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그 선택이 굉장히 중요해집니다. 내가 목표로 하는 좋은 글을 담고 있는 책을 골라야 한다는 이야기죠. 그게 소설일 수도 있고 시가 될 수도 있겠죠. 어쩌면 딱딱한 자기 계발서가 될 수도 있고요. 저마다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글이 다를 테니까요. 그러니 그 종목을 제대로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책을 선택하면 그냥 그 작가가 된 것처럼 미치도록 읽어야 합니다. 이 작가 저 작가 애인 갈아치우듯이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제대로 한 작가만 편식하라는 겁니다. 아주 지겨워질 때까지요. 그 작가의 책만 주야장천 읽으라는 겁니다. 그의 연대기와 함께 하면서 그와 관련된 모든 콘텐츠를 소비하는 겁니다. 완전히 그가 되는 거죠. 그의 생활양식을 따라 하고 최종적으로는 그가 됐다고 망상을 품는 겁니다. 그 지경이 되면 억지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작가의 문장력이든 문체든 따라 하게 될 겁니다.”
“작가의 세계와 내 세계가 충돌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게 됩니다. 의심하지 말고 한 번 뛰어들어 보세요. 그 정도 할 값어치가 없다고요? 자신감이 부족하다고요? 그럴만한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고요? 그러면 자세부터 찾고 생각부터 교정하고 다시 오세요. 글쓰기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호기심만 갖고 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 목숨을 축내는 게 글쓰기란 말이에요. 아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