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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Oct 22. 2021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른다.

자유란 대체 무엇일까? 인간에게는 과연 자유를 누릴 자격이 주어졌을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쓰는 글은 나의 자유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는 나의 어떤 최초의 시점을 향해서 역행 중인 건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냉담하게 순행 중일까? 순행한다면 그것에는 어떤 체계적인 질서가 부여되어 있을까? 나의 질서는 어디에서 시작되어서 어디로 진행 중일까? 나는 비틀거리지 않고 내가 가야 될, 그러니까 예비된 지점으로 곧바로 이동 중인 걸까?


질문은 그치지 않는다. 가을날 고독하게 떨어지는 낙엽처럼 죽을 때까지 나는 셀 수 없는 의문을 던지고 그 의미에 대해 상념에 빠질 것이며 또한 대부분의 경우 의문에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흐름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어느 정도 제한적인 범위 내이긴하지만.


나는 혼란의 첫 장으로부터 시작됐다. 모든 인간이 무질서에서 어떤 변칙적이면서도 즉흥적인 판단 탓에 강제로 생명을 얻었듯 나 역시 그 무질서한 우연함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우연함이 나를 살렸고 나라는 인간을 여기까지 길러냈다. 내가 태어나기 전, 나는 내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그런 신적인 지위도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능력도 부여되지 않았으니까, 그저 어느 순간 나라는 존재를 자각했던 시점에 도달해서야 내가 나라는 사실을 겨우 인지할 수 있었달까.


나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그 행운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그 강제적인 행복의 순간을 축복하겠다고는 정의하지 못하겠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첫 번째 자유가 아니기에, 나는 그 자유가 나에게 예속된 것이라 인정할 수 없다. 그 자유는 나에게서 피어난 씨앗이 아니다.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른다. 어느 독일 시인이 자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며 그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가 이야기한 내려놓음, 버림을 머릿속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대체 살아가야 한다는 도전에 맞선 사람에게 어찌 버린다는 것, 내려놓는다는 것이 종속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건 죽어서야 겨우 가능할 것이다. 완벽함이 아니라면 나는 그 모순적이면서도 제한적인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겠다.


조르바는 자유를 안다고 말했다. 몸으로써 말이다. 약탈하고 살해하고 강간을 저지르는 그에게 자유의 의미는 대다수의 평범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유와 비슷하게 사유될 수 있을까. 그 자유란 것은 내 상상의 범주로는 적어도 고상하지 않으며 그저 한 인간에게 강하게 결속된, 말하자면 타인에게는 일반화되지 못한 제한적인 자유일 것이다. 그런 자유에 대해 지금의 내가 이렇다 저렇다 의미를 논하는 것은 그저 말싸움이거나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유를 생각하면 나는 빈 하늘에 던져진 사슬 하나를 연상하게 되며 그 사슬 끝에는 공중으로 날아가는 몇 마리의 새를 목격하게 된다. 새는 사슬에서 방금 풀려나 어느 지점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날아가는 새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 의미를 이해할까. 새는 어디로 날아가야 할지, 안착해야 할 지점을 열심히 날갯짓을 하면서도 공상하고 있을까. 나는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새의 자유를 논하는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이렇게 글을 쓴다는 거 자체가 그럴 자격을 부여한다고 믿는단 말인가.


셀리 케이건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선택을 이렇게 말했다. “어떤 선택을 내릴 때 그것과는 다른 선택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라고. 선택은 자유를 직면하는 순간마다 권리를 행사한다. 나는 항상 선택의 순간, 적어도 나에게 유리한 대로 신중하게 선택을 내렸을 거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어떤 선택들은 그런 상태에서 제외된다. 예외사항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프로그래밍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을 되돌릴 수 있다. 예외사항들은 다시 찾아오는 동일한 선택을 직면하게 될 때 빛을 발하게 될 테니까. 그러니 과거의 선택은 미래에서 말끔하게 지워진다.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나는 아직도 사슬에 묶여 있다. 사슬은 나를 계속 비끄러매고 있다. 발악해도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다. 이렇게 글을 쓴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슬에 풀리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영혼과 육체를 이원화시키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그 해결책은 내가 죽어도 수천 년, 혹은 수 만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자유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된다고 말한다. 자유론에서 언급했는지 어디서 들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내가 지어낸 말은 아니니 적어도 어디선가 듣고 슬쩍 써먹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자유는 그런 거라고 정의한단다. 내 인생이 혼돈에서 시작되어서 이제 안정화 단계, 즉 질서의 단계로 넘어가는 흐름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 질서라는 것은 죽음에 순응하는 과정이 아닐까 가정해 보기도 한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어떤 할아버지를 목격했다. 그 할아버지는 중력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고개를 앞쪽으로 연신 주억거리며 당장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기세였으니까. 나는 인생의 속절없는 패배의 순간 같은 것을 그 장면에서 느꼈다. 순응이라는 것, 질서를 잡아간다는 것, 그것은 결국 앞으로 찾아올 죽음에 겸손하게 된다는 게 아니겠는가. 겸손한다는 것은 고개를 앞으로 조아림을 의미할 것이다. 어렵다. 질서를 잡아간다는 것은 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와 함께한 마지막 순간 이런 결심을 하게 된다. “그의 표정이 내 내부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던 셈이다. 나는 내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았다."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면, 그가 겪은 그 순간이 동일하게 나에게도 찾아올까? 더 이상 이렇게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정신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순간을 카잔차키스처럼 겪게 될까?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공중에 던진 돌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만든 자유 덕분에 비상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고 한다. 태생적으로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은 자신의 처지를 돌과 다를 바 없다고 믿는다. 적어도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믿었다. 인생이라는 험난한 여정을 자유의지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자유의지란 그저 환상에 불과할까? 우리는 삶을 주체로서 통제하지 못할까? 통제가 가능하다면 대체 어느 만큼이나 그 자격을 오래도록 누릴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내가 글을 쓰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약 3,000자의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선택도 과연 제한적인 자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어렵다 자유.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게 편할지도.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나는 송장을 메고 다니는 보잘것없는 영혼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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