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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14. 2021

나는 둥근 레고 한 조각이다

하루가 시작되는 기상나팔이 낮게 퍼지면 나는 어김없이 건조한 감성의 소유자로 변신해야만 한다. 이불을 느리게 개고 창밖에 자욱하게 퍼진 낯선 안개의 인사를 맞으며 오늘은 또 내가 아닌 나와 얼마나 자주 접촉해야 할 것인지 큰 숨을 몰아쉬며 가짜 희망에 빠진다. 


04:30, 그런 부지런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나는 매우 게으르게 마라톤 후발 주자처럼 저 끝에서 한참을 뛰고 있다. 느리다, 너무 느리다. 아니 부쩍 느려졌다. 그래서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아직 바깥도 실내도 내 생각도 모두 어둡다 그러므로 나는 충분히 환기되지 못할 것이다. 옆에 누운 고단함에게 고의적으로 말을 붙여본다. 나는 어제도 고단함을 살해했다. 나는 미필적 고의로 어떤 존재를 매일 교살하고 있다.


너에게도 숨을 쉴 공간이 가끔 필요하겠지. 잠시나마 누워서 공상을 누려볼 기회를 찾고 싶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빈틈이 없다. 우린 아픈 눈물이 마를 만큼 여유도 없다. 빠르게 전선에 당도해야 한다. 보충병에게 자리를 빼앗기기 전에.


어제와 같은 시간, 표정, 자세로 책상 앞에 앉는다. 마우스를 오른쪽으로 두세 번쯤 회전하고 키보드로 글자들을 타이핑한다. 어긋나지 않는다. 정교한 타격음, 규칙적인 울림이 손가락 끝에서 감지된다. 그리고 손목, 팔꿈치, 어깨를 따라 심장에까지 전기적 신호들을 무신경하게 흘려보낸다. 박자에 맞춰 심장은 물결치듯 익숙하게 고동친다.


현장에는 내 심장에서 흘려보낸 저항의 파열음들이 낭자하다. 나는 그것들을 쓸어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고개를 떨구고 인위적으로 만든 공상의 바다에 파묻어버린다. 차갑다, 거센 저항이 다가온다. 맞서지 못한다. 비겁하게 뒤로 물러선다. 


나란 존재는 이런 것이다. 사각형의 각진 레고들 속의 둥근 레고 한 조각에 불과하다. 나는 그들이 만든 공간에 끼어들지 못한다. 나는 그저 동그랗게 말린 그림자 같은 것이니까, 사각형 속에서는 언제나 은둔자, 훼방꾼, 야경꾼에 불과할 테니까.


책상 앞엔 거대한 파티션이 베를린 장벽처럼 우뚝 서 있다. 나는 이 둘레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는다. 하지만 나는 반대편, 무인도라는 선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삶은 오늘도 아슬아슬 위태롭게 장벽 모서리에 설치되어 있다. 날카롭고 뾰족해서 오랫동안 주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직시하고 있다. 그래도 좋다, 나는 장벽 안쪽이든 바깥쪽이든 그곳이 아무리 안정적일지라도 그곳이 비교적 무덤보다 평화롭지 않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높고 튼튼하던 베를린 장벽의 위용은 무너지고 말았다. 2004년, 내가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은 완전히 해체된 상태였다. 나는 전리품처럼 무너진 벽 일부를 2유로를 주고 구매했다. 벽은 벽 자체로서의 힘을 잃고 상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간은 그런 것이다. 물리적인 것이든 개념적인 것이든 돈으로 값어치를 매긴다. 그때부터 베를린 장벽은 나에게 2유로가 됐다. 나는 또 다른 장벽을 찾아 세워야 한다. 언젠가 그것도 무너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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