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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13. 2021

아내가 가출했다 17

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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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가출했다 16






화면 속의 남자는 마치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물론 그 남자에게는 눈이 있지만 그것은 그 소임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오직 그 속엔 눈으로 짐작되는 것 같은 기묘한 정체성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인간의 범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저너머의 세상에서나 이해가 가능한 그러니까 임자 없는 벤치 위에 적적하게 내리는 안개비와 같은 것이었다고 할까. 


그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계속 던졌다. 나는 열심히 경청하려고 애썼으나, 단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언어는 몸의 그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마음의 뒤편에 서 있는 말하자면 의식 저너머에서 던지는 최종 선고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그 세계에서 더 멀어질 수밖에.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어느 순간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몸이 감각하는 것인지 마음이 움찔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해의 프로세스 개입 없이도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순간이 갑자기 찾아온달까.


아무튼 나는 의심이 가득했지만, 제니퍼의 말이니 무조건 신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제니퍼의 말을 믿었을까. 다소 그렇게 감정을 주도하며 어느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이끄는 행태 자체가 이상했다. 


아내가 가출한 이후로, 내 집에선 여자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어쩌면 내 평생의 여자는 완벽하게 지워지는 게 맞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여자는 지루하고 지겹고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이제 나는 그동안 누리지 못한 자유, 나에게 찾아온 완벽한 자유란 것을 즐길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자라는 존재에게 휘둘리고 있다. 그렇게 되는 게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너무나 이상했다.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등장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기묘하게도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나는 화면 속 남자의 동작을 따라서 눈을 감았다. 남자는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배로 내쉬는 동작, 즉 복식호흡을 강조했다. 스마트폰에서는 남자의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외계 행성에서나 들릴 법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명상센터에서나 나오는 그런 종교적인 색채가 아주 강한 음악이었다. 몸이 곧 나른해졌다. 온몸 세포 하나하나가 잠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매트 위에 누워버린다면 금방 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집중해야 했다. 의식을 떨어뜨리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제니퍼도 그런 건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양손을 모아 배꼽 아래쪽에 가지런하게 두었다. 그리고 허리를 곧게 펴고 가부좌 자세를 유지하려 애썼다. 목부근에 강하게 힘을 주려했으나 남자는 힘을 빼는 게 중요하다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의식을 버리라고 주문했다. 숨을 들이쉬면서 세상을 받아들이고 내쉬면서 욕망을 버리라고 말했다. 


그렇게 세계에서는 이상하게 생긴 욕망이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거기선 내가 주인공이 아닌, 그곳을 관찰하는 역할이 전부였다. 마치 기자가 보도하듯이 나는 거기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기만 했다. 변화는 잔잔한 호수처럼 균일하게 어디론가 번져갔다. 나의 생각조차 그 호수 위에 떠다니는 작은 잎사귀에 불과했다. 잎사귀가 된다는 것, 그러니까 나에게 속한 어떤 껍질을 벗어버리고 한없이 가벼운 물체,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돌아간다는 게 얼마나 인생을 가볍게 만드는 일인지 실감하려 애썼다.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생각을 버리라고 강조한 남자의 속삭임이 언제 여기에 와서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런 말이 애초에 존재했었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그냥 차분하게 왔다 사라졌다. 그러다 소리가 멈춰졌다. 스마트폰의 소리도 창밖에서 들리던 가을바람의 서성거림도 문득 잦아들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완벽하게 동화라도 된 걸까.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주변을 인지했다. 여전히 나는 내 방안에 있었고 가부좌를 튼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시간은 약 20분 정도 흘렀다.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흐른 건지 알 수 없었다. 


바깥쪽은 비교적 평온했다. 이 집에 다시 나 혼자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제니퍼는 떠났지만 그녀의 온기는 이곳에 남아있었다. 어쩌면 공기방울처럼 사라진 것이 옳다고 봐야 했다. 현관문은 안쪽에서 잠긴 채 그대로였다. 제니퍼는 어느 순간 나타났다, 홀연히 다른 공간으로 흡수됐다. 거실 창에서 불어오는 아침 바람처럼 이유 없이 이 집안에 드나들었다가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떻게 사라졌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가 요청한 명상이 그녀의 존재를 이 공간에서 트리거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지하 피라미드 공간에서도 명상 중이었다. 명상은 공간이동의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내 방 안에 앉아 이유 없이 명상에 빠져있다 깨어났다. 그녀와 나를 이어주는 건 명상일까. 그것은 끈 같은 것일까? 세상엔 명상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 그들 모두가 명상할 때마다 거처를 옮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신의 선택이라도 받은 걸까?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집 나간 아내를 대신하기 위해서?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내 삶에 개입이라도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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