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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12. 2021

아내가 가출했다 10

지하 세계에서의 탈출, 돌아갈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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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와 잠시 이야기 나눌 시간이 되시나요?” 제니퍼가 물었다.


  물론 시간은 많다. 더군다나 내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로 듣는 일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듣는 일이란 언제나 즐거운 일이 아닌가. 그것도 연예인의 일이라면 더욱더. 그런데 지금 시간이라면… 아, 맞다 지금 대체 몇 시지? 시간의 관성으로부터 열 걸음 정도는 떨어진 것 같다.


  손목에 찬 시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계는 여전히 오후 3시에 멈춰져 있었다. 뭐야, 왜 아직 3시밖에 안 된 거야? 지금 여기 내려와서 적어도 1시간 이상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 3시라니. 뭐 시간이 정지라도 해버린 거야. 혼란스러웠다. 가출한 아내의 충격적인 집 매매 소식, 지하 세계에 사는 제니퍼 리라는 기묘한 여인, 그리고 피라미드. 도대체 이런 정보들이 나에게 전달하려는 상징은 무엇일까. 내가 이런 상징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제 업무는 여기까지라서요. 고객에게 물건을 배달하면 업무는 바로 종료된다고 회사에서 전해 들었어요. 집에 가서 긴히 할 일도 있고…”


  사실로 말한 다면, 집에 가서 특별하게 할 일은 없다. 아마도 집이 매매가 됐는지 그 여부부터 확인 절차에 들어가야 할 것이고 일하느라 잔뜩 땀이 밴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냄새든 소리든 무엇이든 지우려고 오랫동안 돌려야 할 것이며, 베란다에서는 미뤄둔 물걸레질을 마쳐야 할 것이다. 그래, 나는 그동안 계속 밀려온 베란다 청소라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베란다는 늘 클린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게 나만의 방침이다. 다른 어떤 공간보다 - 안방이나 서재보다 - 더 깔끔해야 한다. 이유는 딱히 없다. 단지 베란다는 베란다로서의 임무를 다하면 되는 것인데, 더러워서는 제 기능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나로서는 그게 가설이 아닌 일종의 정설이 돼버렸다. 그래서 나는 제니퍼의 요청 사항, 거기에 물론 살짝 구미가 당기긴 했지만 오늘은 튕겨보기로 했다.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남녀 사이에는 밀고 당기기가 가끔 필요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보여주기로 하는 게 좋겠다.


  “알겠어요. 우리에겐 시간이 많으니까요. 그럼 수요일에 또 보겠네요?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소설은 잘 읽어볼게요.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럼 왜 소설을 써 오라고 주문을 한 거였을까. 도무지 이상한 여자가 아닌가. 단지 내가 무명이었기에 앞으로 어떤 가능성을 내포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혹은 남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분이라 그런 곳 자체도 가끔은 너무나 진부하고 식상해지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 어떻게 이런 인간도 잘 살아가는지 그런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의 속내가 궁금했던 걸까. 그녀는 딴 세상에 사는 우리와는 범주가 다른 연예인이니까,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어마어마한 몸값을 자랑하는 연예인들일 테니까, 내가 지닌 평범성이 제니퍼 리에게는 고양된 삶을 잠시 식혀주는, 바닥으로 끌어내는 어떤 신선함이나 동기부여라도 되어줄지도 모른다. 뭐, 아무려면 어떠랴. 아무 의미도 없다. 지금은 퇴근이 나에겐 당면 과제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에겐 아직까지 돌아갈 곳이 있다.


  “저는 돌아갈 곳이 있어서요. 원칙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변칙은 웬만하면 인정하지 않는 편입니다. 3시까지 저는 고객님에게 물건의 배달을 완수했으니 퇴근하는 게 지금의 제가 원하는 원칙입니다. 오버타임은 여간해선 싫어해서요. 그래서 회사에 다닐 때에도 야근은 거의 하지 않았어요. 혹시 일본 가수 키로로 아세요? 그들이 부른 노래 중에 歸る場所라고 있거든요. 한국말로 발음하면 카에루바쇼죠. 뭐, 이것은 중요한 게 아니지만, 어쨌든 제가 참 좋아하는 일본 가수의 노래인데요. 퇴근 무렵이 되면 저도 모르게 입으로 흥얼거리게 됩니다. 뭐 그렇다고 여기서 노래를 불러보겠다는 건 아니에요. 퇴근할 때면 규칙처럼 떠오르는 歸る場所같은 노래가 있듯이, 저는 원칙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노래로 언급하고 싶었어요. 이 노래의 제목은 한국말로 ‘돌아갈 곳’이에요. 제니퍼님도 저에게도 돌아갈 것은 있죠. 물론 제가 돌아갈 곳은 앞으로 사라져버릴지도 몰라요. 그까짓 거, 그냥 집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지하 세계에서 요새, 피라미드와 같은 공간을 꾸며놓고 사는 분이라면 25평 아파트쯤이라면 꽤 하찮게 여기실지도 모르죠. 아무튼 전 작지만 아직까지는 돌아갈 곳이 있단 말입니다.  홈 스위트 홈 말이에요. 저는 오늘 집에 가서 세수를 하고 발도 닦고 베란다 청소를 할 겁니다. 묵은 때를 벗겨내고 광이 나듯 베란다를 쓸고 닦을 거예요. 무릎을 꿇고 쓱싹쓱싹 문지르며 말입니다. 아, 카에루바쇼까지 말씀드렸죠? 이 노래는 나중에라도 꼭 들어보세요. 제니퍼님에게도 따뜻하게 웃는 얼굴이 떠오를지 모르겠지만요. 늘 옆에서 웃어주던 제 아내는 어느 날 집을 나가버렸네요. 하하. 저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질지도 모르겠어요.”


  제니퍼에게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등을 돌려버렸다. 참으로 차가운 여자다. 그녀는 냉정함을 두루두루 갖춘 사람인 것 같다. 그러니 이런 지하 공간에서 혼자 살아가는 거겠지. 어쩌면 가출한 아내도 이런 공간으로의 입주를 원할지도 모른다. 이런 세계는 고독을 포괄적으로 품는 것 같다. 그녀도 나도 아내도 모두가 고독하게 살아가는 존재다. 나 역시 이런 지하 세계를 구축하면 참 좋겠다는 가정을 세워본다.


  나는 1시간 전, 이곳 지하 피라미드에 도착했던 역순으로 다시 지상의 세계로 빠져나갔다. 1층을 의미하는 삼각형 모양의 버튼을 누르고 한참 동안 지상으로 올라갔고 다시 회색빛 콘크리트 공간을 거쳐서 현관에 도착한 다음, 작은 정원을 통과하여 집 바깥으로 이동했다. 바깥에서 본 제니퍼의 집은 그냥 단독주택일 따름이었다. 이런 집은 누하동 뿐만 아니라, 서울 어느 동네에서도 구경할 수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이런 곳에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이런 곳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생각을 했을까. 수요일에는 그녀에게 그것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다.


  광화문역까지 걸어간 후, 다시 지하철에 올랐다. 그리고 '부자 되세요'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아내 집의 매매 여부를 확인했다.


  - 다음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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