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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13. 2021

아내가 가출했다 11

굿 뉴스와 배드 뉴스

아내가 가출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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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뉴스와 배드 뉴스가 있는데요. 어느 소식부터 먼저 들으시겠어요?"


"굿 뉴스와 배드 뉴스라. 러시아에서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상대방과 협상을 시도할 때 배드 뉴스를 먼저 듣고 나서 그다음 전략을 펼치는 게 효율적이라고 하던데요? 그렇다면 저도 배드 뉴스를 먼저 듣겠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죠? 자, 맞을 준비 끝났습니다. 세게 명치끝에 한 방 날려주세요."


"음. 과연 현명한 전략일까요? As You Wish, 원하신다니 배드 뉴스를 먼저 들려드리지요. 운 좋게도 오늘 점심때 집이 팔렸답니다. 그러니까 계약이 성사됐다는 얘기죠.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죠? 요즘 부동산이 너무 불경기라서 여간해서 집이 나가지 않는 편인데, 귀신에 홀린 것처럼 갑자기 거래가 성사되어버렸다니까요.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대출 규제가 보통 심한 게 아니잖아요. 물론 제가 워낙 사업 수완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입의 비즈니스로도 안 통하는 게 많은 편이거든요. 이 바닥이 그래요. 그런데 뭔가 일이 술술 풀리려는 건지, 하여튼 통장에서 카드대금이 뜬금없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집이 팔려버렸어요. 그것도 아주 좋은 금액으로 말이죠. 선생님 사모님은 대박이 났어요. 3억에 산 집을 20억에 팔았으니 대체 시세차익을 얼마를 거둔 거예요. 우리 옆집에 사는 개똥이가 로또 1등에 당첨되고 7억을 받았다던데, 그것보다 더 나은 조건이 아니냐고요. 자 이 정도면 선생님께는 최고의 배드 뉴스가 맞죠?"


"아, 최고로 나쁜 소식이군요. 물론 가출해버린 제 아내에게는 최고로 좋은 소식입니다만... 그럼 굿 뉴스라는 건 대체 뭘까요? 설마 집이 팔렸지만 새로운 집주인 분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푼 나머지 그 집에서 거주할 지위 비슷한 것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뭐 이런 행복한 스토리로 결말을 맞는 건 아니겠죠? 제가 신데렐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요."


"선생님. 농담이 심하시네요 호호. 그런 일이 대체 기원 후, 2천 년이 지난 시기에 생기겠어요? 우린 집 강아지 찰리도 배불리 먹고 침대에서 편안하게 누워 자는 그런 풍요로운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요. 그런 일은 요즘 천국에서도 벌어지지 않아요. 에효 농담하지 마셔요."


"그렇다면 굿 뉴스는 대체 뭔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별 기대는 되지 않지만, 일단 들어보고는 싶네요."


"네 굿 뉴스는 선생님에게 약간의 시간이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집이 계약은 되었지만, 매수자분에게도 얼마간의 돈을 모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20억이 넘는 돈을 한 번에 지불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여유를 가진 사람이 대한민국에 어디 있겠어요. 그건 이재용 회장도 쉽지 않을 거예요."


"그분도 자금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계약금과 중도금 그리고 잔금까지 아마도 6개월 가까운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아요. 그러니 선생님은 그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치열한 삶의 전장에서 어떻게 생존자로 남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셔야 한다는 거죠. 아, 참 방금 말씀드린 문장은 제가 지어낸 게 아니에요. 선생님 사모님께서 꼭 전해달라고 직접 작문하신 문장이었어요. 사모님은 선생님께 제발 살아남아달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시면서요. 위의 문장을 있는 그래도 전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거든요."


"하, 참 이런 이야기 입으로 꺼내기 쉽지 않네요. 뭐, 부동산 아줌마들 다 그렇잖아요.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 천연덕스럽게 별말을 다 꺼내게 되네요. 부동산으로 먹고살려면 별의별 일들을 다 처리해야 합니다. 우린 가끔 손님들 택배까지 받아준다니까요. 이런 손님들의 송사까지 해결해야 한다니... 호호. 제 이야기 충분히 이해하셨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갑자기 이 대사가 생각났어요. 제가 참 좋아하는 화백이 만든 어떤 장면의 대사인데요. 아무튼 제가 다른 손님과 상담이 있어서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혹시 궁금하신 게 있으면 상가 '부자 되세요' 부동산에 한 번 들르세요. 그럼 전화 끊을 게요. 부자 되세요~ 호호호"


전화를 끊자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나는 자기 할 말만 마구마구 내뱉어놓고 전화 끊는 인간을 제일 혐오한다. 그야말로 듣는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부류가 아닌가. 그쪽에 아무리 재능이 없다고 한들,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집이 없는 신세로 전락한 한심한 남자라지만, 그런 신세라는 사실을 모두 아내에게 여과 없이 들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이럴 줄 알았으면 계약이 성사되지 않도록 어떤 버티기 작전이라도 도모해야 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들었다. 괜히 깔끔하게 청소를 해두고 출근해버린 것 같았다. 이를테면 집에서 홀아비 쉰내라도 풀풀 나게 속옷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는다거나, 라면 국물을 일부러 싱크대 바닥에 엎어버린다든가, 변기 물을 내려버리지 않고 나온다거나,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했어야 했다. 그게 내가 이 집에서 그나마 오래도록, 질기게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을지도 모를 텐데, 나는 그 기회를 상실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 빌어먹을 깔끔함, 대체 지저분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이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만 것이다.


그래, 이미 일은 김밥 옆구리 터지듯 벌어지고 말았다. 나는 쫓겨나게 됐고 단지 그 일은 잠시 유예됐을 뿐이다. 내 통장 잔고는 아내가 보태준 100만 원과 앞으로 아르바이트로 벌게 될 쥐똥만 한 주급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 오래 일하게 될 거라는 기대감은 모두 사라졌고, 대체 지하 요새에 사는 조현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이상한 여자와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상대해야 된다니.


맙소사! 아르바이트 담당자는 나에게 분명히 그랬다. 짭짤한 부수익이 생길 확률이 아주 높다고, 그런데 그 여자는 나에게 단 한 푼의, 그러니까 편의점에서 바나나 우유 하나 뜯어먹을 팁조차 내밀지 않았다. 이런 뻥쟁이가 있나. 물론 나는 애초에 그런 걸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가벼운 돈은 코흘리개, 애송이들이나 덥석 받아마시는 거다. 나는 지금 한 탕을 거둬야 한다. 그래, 그 연예인, 대체 제니퍼 리가 누구야. 나는 그런 여자를 영화계든 드라마 쪽이든 들어본 적이 없다. 자기가 과거에 얼마나 잘나가던, 한국 영화계의 마를린 먼로쯤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여자는 그저 과거의 영광에 취한 나머지 현재를 애써 거부하며 사는 인간일 뿐이다.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매일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미국에서 직구한 멜라토닌 따위의 영양제로도 효과를 보지 못해서 결국 피라미드처럼 생겨먹은 와인냉장고에서 싸구려 와인 하나를 꺼내놓고 병째로 홀짝홀짝 마셔대는 꼴값이나 떨어대거나, 자신이 나온 비디오나 처량하게 훔쳐보며 우수에 젖어대는 그런 부류일 것이다.


배가 고팠다. 지하철역에서 내리자마자 마트에 들렀다. 9,900원짜리 자두 한 박스, 오이 3개, 흙이 잔뜩 묻은 당근 2개, 비빔면 한 번들, 고소한 맛이 난다는 누룽지 과자, 초코맛 스낵, 멜론 맛 아이스바 2개를 구입했다. 이제 이판사판이다. 아내가 준 100만 원에서 28,200원이 결제됐다. 뭐 어떻게 되겠지. 인생이 뭐 계획한다고 그 계획대로 흘러가던가. 그냥 무계획적으로 살아가보는 것도 좋겠다. 어쨌든 주급을 모아서 나중에 고시원이라도 들어가면 되지 않겠나. 아, 그런데 냉장고에는 이미 먹을 게 충분히 있었는데, 과소비를 하고 말았다. 이거 살림엔 역시 젬병이다. 충동적으로 저질러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전략이다.


나는 다시 마트로 돌아가서 영수증을 내밀고 물건을 환불했다. 캐셔는 짜증 나는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은 원래 환불이 안 되는데 그냥 처리해 주겠다면 아랫입술을 쓱 내밀었다. 환불하고 나서 다시 금액이 통장으로 돌아오려면 얼마간의 시일이 걸린단다. 내일쯤이면 돈이 돌아온다니 오늘은 두 다리 펴고 자긴 글렀다. 이런 썩을.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나는 이부자리를 펴고 하루 동안 벌어진 기묘한 일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그러다 금세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새벽 3시쯤 됐을까. 거실에서 들리는 이상한 부스럭거림 때문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 다음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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