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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16. 2021

아내가 가출했다 12

새벽 3시,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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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새벽 3시마다 깨는 것은 오래된 불면증 증상 중 하나였다. 그것은 딱히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어떤 전조 증상이 아닌, 단지 일정하게 새벽 3시쯤 눈을 뜨는 것이 전부인 지극힌 일상적인 현상 중 하나였다. 다만, 그날 새벽 3시는 평상시의 공기와 미묘하게 달랐다. 알 수 없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공기 분자 속에 아주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내가 누워 있는 이 방이 절대 내가 와서는 안 되는 어떤 불멸의 세계. 그 비밀의 문을 나도 모르게 열어젖힌 느낌, 나는 마치 오늘 낮에 들린 그 여자의 집, 그리고 그가 직접 만든 피라미드 형상의 집이 생각났다.


잠이 오지 않으면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다. 생각 하나는 새로운 생각을 파생시키고 그 안쪽으로 끊임없이 나를 포섭하고 끌고 들어간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순간 내가 생각이 낳은 절망의 사생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득하고 컴컴한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어느 순간 굴러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아득하게 희미한 옛 공간에서 의미의 비늘이 걷히고 새로운 욕망의 뿔이 돋아나는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상상, 마지막엔 항상 내가 암흑으로 점점 퇴화되다, 결국 점 하나만도 못한 존재로 환원되고 마는 그런 상상, 어쩌면 그곳은 내가 곧 겪게 될 미래의 한 잿 자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슬며시 눈을 떠보니 탁상시계는 어김없이 3시 부근을 알리고 있었다. 침묵을 지키려는 탁상시계와는 달리, 문틈 사이에서는 희미한 불빛과 소음이 한데 섞여서 들어오고 있었다. 부스럭, 비닐이 뜯기는 소리,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우당탕 무언가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 온갖 소음이 어둠 속에서 마치 도깨비 불빛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물론, 도깨비 불은 그저 상상 속에서 만든 결과에 불과하다. 나는 실제 내 방 침대에 계속 누워있었고 문 닫힌 내방 안쪽과 거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선 그 어떤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전혀 관심 갖고 싶지 않았으니까. 거실은 거실의 일, 내방 안쪽의 일은 내방이 감당하는 지극히 프라이빗한 영역의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유달리 신경이 그쪽으로 향했다. 문쪽에서 반대로 돌아누워도 거실 쪽에서 새어 나오는 소음과 불빛의 향연 탓에 나는 절대로 다시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궁금증은 결국 수면을 이긴다. 늘 그러는 편이다. 과거 어느 날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내 궁금증은 수면의 파도를 잠재워 버렸다.


무거운 몸뚱이를 일으켜 세웠다. 몸보다 정신이 한 걸음 더 앞서 나갔다. 이미 거실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어버렸달까. 제 마음대로였다. 몸뚱이는 언제나 자유를 원했다. 하지만 몸은 조바심 보다는 참을성을 더 키워야 했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보다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마음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문고리를 아래쪽으로 밀자, 거실에서 작은 빛이 안쪽으로 침범했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숨을 속으로 감아쥐고 문 바깥으로 몸을 살짝 먼저 보냈다. 발바닥이 바닥에서 떨어질 때마다 쩍 하고 물기가 뜯겨나가는 소리가 났다. 끔찍한 소음이었다. 별안간 폭음이 터지는 그런 곤란한 소리였다. 절대 내 행동이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인데, 만천하에 내 몸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고 알리는 형국이었으니.


그 불길한 인기척 소리는 냉장고 방향이었다. 그러니까 거실 주방 쪽이라는 얘기였다. 냉장고 문은 늘 닫혀 있다. 그게 정상이다. 문이 열려 있다는 건 누가 바깥에서 인위적인 조작을 했다는 증거다. 그런데 문이 비스듬하게 열려있다. 게다가 그 밑에 시커멓게 생긴 두 발바닥이 보였다. 그 위에는 쪼그려 앉은 어떤 사람의 구부러진 모양도 같이 보였다. 그러니까 다시 설명한다면, 냉장고 문이 난데없이 비스듬하게 열려 있고 그 앞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있고 발바닥은 시커멓게 생겨먹었는데, 그러니까 몇 달은 씻지 않은 것처럼 생긴 아프리카 부시맨의 그것처럼 생겼더랬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냉장고 속에서 뭔가를 계속 찾는 듯했다. 두 손일 것이다, 아마도 그 속을 뒤지는 건... 아무튼 두 손으로 냉장고 속을 끝없이 뒤집고 헤집었다. 그리고 먹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기어코 찾아냈다. 시리얼, 신라면, 미주라 통밀 비스킷, 생쌀, 그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쉭쉭 거리는 숨소리와 헉헉거리는 불협화음을 언발란스하게 발생시키며 보이지 않지만 그 입은 무엇이든 소화시킬 태세였다. 분명 그랬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 존재가 덥석 집어삼키는 중인 그 음식들은 분명히 찢겨 나가는 소리를 냈고 그 존재의 몸 안에서 소화시키는 그런 반응을 나타냈으나 바닥에는 그 물건의 원래 모습 그대로 내동댕이 쳐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아귀는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그 형체의 주인, 그러니까 현재 소음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그래, 아내였던 것이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왜? 하필이면 새벽 3시에, 그것도 나에게 인기척도 하지 않고 어딘가에 숨겨 놓은 패물을 챙겨가는 것도 아닌, 저 보잘것없는 인스턴트 음식 따위에 빠져 있느냐는 얘기다. 그렇다면 저 물건은 아내가 아니라는 얘기다. 아마도 아내일 확률은 0%에 근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여보?”라고 공중에 아주 약한 발성을 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그 존재는 냉장고 뒤에 숨어서 그 속의 모든 먹을 것들을 바깥으로 배출시키는 중이었다. 참으로 열심이다. 그렇게 열심히 먹고 순식간에 소화시키는 존재는 이 세상에 본 적이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시끄럽던 소음이 잦아들었다. 팔뚝에서 식은땀 하나가 빙그르르 떨어졌다. 그리고 쉭쉭 숨을 거칠게 내쉬던 냉장고 뒤의 존재가 갑자기 냉장고 옆으로 고개를 휙 드러냈다. 나는 그와 동시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바닥과 엉덩이 사이에서 쿵 하고 뭔가 큰 구멍을 내는 소리가 났다. 커다란 충격파였다. 온 집안이 진동하고도 남을 그런 충격파.


하지만 내가 그렇게 졸도할 지경의 놀람과는 상관없이 잠시 공간에 생긴 균열은 잦아졌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덧이 일순간 모든 존재가 고요해졌다. 어둠 너머의 냉장고 뒤에 숨겨진 그 존재는 본연에 충실했다. 끊임없이 입속으로 음식을 쑤셔 넣었고 바로 소화시켰지만 음식은 그 형체대로 배출됐다. 그러다 모든 음식을 소화시킨 것이 확인된 순간 그 존재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존재의 형상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목은 굉장히 길었고 게다가 그것은 스트로크 그 자체였다. 아니, 바늘이라고 묘사하는 게 더 잘 어울렸다. 그 존재의 얼굴은 웬만한 여자의 몸체 정도의 크기였지만 목구멍은 비상직적으로 길고 얇았다. 그딴 목구멍으로 어떻게 음식을 소화시킨단 말인가.


그래, 난 그런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물건은 아귀라고 부른다. 입은 크지만 목구멍은 제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는… 하지만 왜 그런 지옥에서나 살아가는 우려스러운 존재가 내 집에 갑자기 찾아왔단 말인가. 인간과 신이 사는 경계가 무너지기라도 한 것일까. 채널과 채널 사이에 교란이라도 일어난 걸까.


그때 갑자기 아귀가 뒤를 돌더니 휙 하고 움직였다. 싱크대 앞으로 성큼 걸어가더니 웅크리고 앉은 채로 아주 기다란 손톱 끝으로 두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속으로 맹렬히 빨려 들어갔다. 하수구에서 음식물이 소화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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