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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18. 2021

아내가 가출했다 13

싱크대 밑 문, 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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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귀 같이 생겨먹은 괴물 혹은 정체는 싱크대 밑의 작은 문 그러니까 왼쪽과 오른쪽 문을 동시에 열더니 그 속으로 그대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꼬리가 휘휘 안쪽으로 휘감기면서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아득하게 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블랙홀과 다른 것은 자의적인 아귀의 태도였다. 아귀는 하필이면 왜 싱크대 밑으로 기어들어간 것이었을까. 그곳은 아귀의 소굴 혹은 본진으로 통하는 하나의 입구였을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줄곧 아귀와 동거 중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을 통 알아차리지 못했다. 감각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어딘가 둔한 게 분명하다. 그러니 아내가 가출하려는 움직임도 감지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누가 아귀 따위와 동거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설마 여기가 지옥은 아닐 텐데. 물론 지금은 지옥보다 더 끔찍한 곳이 되었지만.


그 정체가 다른 차원의 문을 어느 순간 트리거했을지도 모른다. 그 문은 물론 내가 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작은 원인을 제공했을지는 예측할 수 없다. 아내가 집에서 나간 이후, 여러 가지 지금까지의 내가 경험한 범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P선배 덕분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으나 연예인에게 물건을 배달하는 '딜리버'라는 직업을 갖게 됐다. 그리고 그 연예인은 피라미드처럼 생긴 지하 세계에 사는 인간이다. 겉으로 그 집을 볼 때는 그가 피라미드와 같은 공간에 산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냥 일반적인 집에서 사는 한물간 연예인에 불과하다. 그 연예인의 진짜 모습은 오직 배달하는 '딜리버'만 알고 있다. 어쩌면 나는 안다는 이유 때문에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될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비밀을 공유한다는 건 목숨을 그에게 의탁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만큼 내가 감당할 무게는 점점 어깨를 강하게 누르기만 할 뿐이다.


그래, 따라가자, 녀석의 뒤를 쫓아가자. 그 정체가 싱크대 밑으로 들어갔다면 나도 어딘지 모르지만 그쪽으로 들어가 보는 거다. 사건의 발단을 찾고 싶다면 원인이 발생한 곳으로 침투해야 한다. 어쩌면 아귀가 모든 사건의 원흉일지도 모를 테니까. 녀석의 소굴을 혹시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나는 지금 어떠한 무기로 무장하지 못한 상태다.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다. 만약 그 아귀가 역으로 공격을 취해온다면, 나는 그에 맞설 힘이 전혀 없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선 그때 생각하면 그만이다. 지금은 녀석이 열어버린 다른 차원의 문을 찾아 봉쇄하는 게 먼저다. 열린 문은 닫아버리면 된다. 그리고 잠가버리면 된다. 안되면 태워버리는 마지막 선택도 있다. 


나는 녀석의 뒤를 쫓아 싱크대 밑의 문을 열었다. 어차피 모든 문제는 이해 바깥의 범주에 놓여 있다. 보이진 않지만 그 문은 다른 차원으로 나를 인도해줄 것이다. 그것이 가설이라 해도 어찌 두렵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이미 누하동에서 멀쩡하게 생긴 단독 주택에 들어갔다가 피라미드를 만나는 봉변을 당한 경험이 있다. 누가 서울 한복판에서 이집트에서나 볼 수 있는 피라미드를 구경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며칠 전부터 상상 밖의 일들이 일상적인 일처럼 벌어지고 있다. 새벽 3시, 지극히 개인적인 장소인 내 집의 소박한 주방에서, 냉장고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문을 태평스럽게 열어 놓고 음식물을 게걸스럽게 해치워버리는 괴물 따위와 조우하게 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일상에 급작스럽게 찾아온 이런 변화에 대해서 감격이라도 하는 게 더 옳았을까.


싱크대 문을 열었더니 안쪽은 어두침침했다. 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보려다 말았다. 머리를 먼저 넣어야 할 것인가, 발을 먼저 디밀어야 할 것인가, 어느 쪽이 먼저인지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이럴 때는 정석적인 플레이를 펼치면 된다. 고개를 낮게 그러니까 포복 자세로 숙이고 들어가자. 그런데 예상치 못한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첫 번째는 온기 없는 어둠이고 두 번째는 피상적인 주방 용기들이었다. 프라이팬이며 아내가 쓰던 온갖 주방 용품들이 난잡하게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나는 프라이팬 여러 개를 한꺼번에 들어서는 왼쪽 주방 바닥에 대충 늘어놓았다. 땡그랑 하고 바닥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괘념치 않았다. 그 따위 소음이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런저런 주방 용품들을 들어서 오른쪽 바닥에 대충 던져놓았다. 대충 치우자 눈앞이 개방됐다. 이제 들어갈만한 공간이 어느 정도 확보됐다. 


낮은 자세로 싱크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더니 벽이 있어야 할 부근이 휑했다. 이럴 수가, 누가 이곳에 토굴이라도 파놓은 걸까. 아파트 도면을 머릿속에 떠올려봤다. 2차원적인 구조로 파악해본다면 싱크대 반대편은 엘리베이터 쪽이다. 그런데 토굴에서는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음침한 느낌마저 들었다.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간헐적인 울림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니 이곳은 영락없는 토굴의 형상이 아닌가. 벽 쪽으로 손을 최대한 뻗어봤다. 싱크대 끝 지점과 벽을 기준으로 공기가 완전히 달랐다. 온도로 따진다면 체감상 10도 이상은 차이가 날 것 같았다. 그것은 이쪽과 저쪽 세상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될 것 같았다. 


조금 앞으로 나아가 벽을 짚었다. 하지만 그것은 벽이 아니었다. 차라리 사후 세계였다. 어쩌면 저 끝에는 스틱스 강이 나를 기다릴지 모른다. 죽은 자들 그러니까 아귀와 같은 괴물들로 변하게 되는 파국을 나도 맞게 될지 모른다.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흐르는 이상한 물은 갈증이 나도 절대 마셔서는 안 된다. 이승의 삶이 종결되고 저쪽 너머의 삶으로 넘어가는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두려움을 안고 스틱스 강이 저쪽에서 나를 기다리다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꿀꺽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안고 나는 계속 기어갔다. 


엄밀히 말한다면 이곳을 구성하는 객체의 대부분은 암석이라 보는 게 맞았다. 여기저기 갈라지고 날카롭게 각진 부근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갈라진 틈에서는 축축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기분 나쁜 바람이었다. 꺼림칙하고도 얼음처럼 냉소적인 바람이었다. 가지 말아야 한다고 뜯어말리는 저승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나를 믿고 계속 전진해보기로 했다. 아귀의 뒤를 쫓아서 녀석의 본진으로 진입해야 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적확하게 모른다. 다만 그렇게 하라고 마음이 지배하니 몸은 그 의지를 따라갈 뿐이다. 무릎을 꿇고 살살 기어서 그러니까 군대에서 배운 그 동작대로 앞으로 이동했다. 바닥에서부터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큼하고 음침하고 짐승의 몸에서 오래 썩은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렇다고 코를 막을 수는 없었다. 냄새야 말로 가장 강력하게 아귀와 가까워진다는 것을 뜻했으므로, 나는 코를 열어놓고 앞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레이더 삼아서...


어둠 속에 나 홀로, 그리고 원인의 심장부를 향해서, 어째서 내가 이 공간의 범법자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예비된 것이니 나는 그 운명대로 계속 팽창될 뿐이리라. 운명은 비켜갈 수도 우회할 수도 없다. 내 공간에 침입한 존재가 있으니 나는 마땅히 그것을 응징할 뿐이다. 반응하지 않는다거나 모른 척하는 것은 비겁한 남자나 하는 행동이다.


어둠 속과 한 몸이 된다는 것. 그래서 내 몸에 속한 세포와 토굴을 이루는 분자들의 구분이 어려워지는 어떤 심층적인 세계에 속한다는 것조차 어느 순간 의미가 없어졌다. 희박해지는 내 본래의 속성, 나를 이루는 모든 물질들이 하나씩 바닥에 흡착되거나 공중으로 분리되어 갔다.


기어가거나 간혹 무릎을 세우거나 이런저런 동작을 교환해가며 얼마나 이동했을지 모르겠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시간 개념도 공간을 구성하는 물질의 분포도 상관없었다. 단순하게 그 공간에 속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는 게 더 문제 있어 보였다. 그러다, 다소 거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약간 굴곡진 그러니까 경사라고는 볼 수 없는 구간을 통과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일정한 흐름이 끊겼다. 급경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뚝뚝 떨어지며 미끄러지던 물방울이 폭포처럼 세차게, 한 방향으로 맹렬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어딘가 끝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조심조심 두 손으로 벽을 짚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무릎을 바닥에 단단하게 지탱하며 마치 바닥의 존재들을 모두 쓸어 담듯 지나가다, 갑자기 나타난 미끄럼틀 같은 그러니까 대리석이었을까 아무튼 그것이 무엇인지는 감지할 수 없었지만, 꽤 미끄러운 언덕 끝 부근이 나타났고 어떤 존재가 뒤에서 내 등을 강하게 밀쳤다는 것, 뒤에서 쇠를 세게 긁어대는 소리가 났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나는 앞쪽으로 고꾸라졌다가 빙글빙글 몇 번을 회전하다가 어둠 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그리고 비명을 토해낼 기력도 없이 목구멍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억누르며 굴러야 했다. 그리고 어딘가 끝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고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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