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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23. 2021

아내가 가출했다 14

제니퍼,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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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주위엔 어둠만 한가득이었다. 어둠은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맹목적이지만 순풍처럼 불어오고 있었다. 어둠은 냉정한 바람이기도 했고 여백이기도 했으며 고독한 야간 경비원의 행세를 부리기도 했다. 나는 현실로 급격히 돌아오며 이 비정상적인 상황, 번듯한 침대 위에 편안하게 누워있는 내 모습을 이해해보려 애썼으나 그렇게 되진 않았다. 


나는 분명히 뭔가에 머리를 세 개 부딪혔다. 그리고 난생처음 기절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책상 위를 마치 돌다리 건너듯 이리저리 껑충껑충 뛰어다니다가 거꾸로 그러니까 720도 공중제비를 돌며 머리부터 떨어진 기억이 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시끄럽게 뛰어다녔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는 단지 여기저기 난폭하게 뛰어다니곤 했으니까. 그런 강한 충격에도 좀체 기절하지 않은 나는 어딘가 강한 부류의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내가 아무리 뭔가에 강하게 충돌했다 한들 기절하다니, 게다가 특정 구간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수 있다니, 도저히 인정할 수도 묵과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모양새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도대체 몇 시간이나 시체처럼 이곳에 누워있었을까. 여긴 어디일까. 나는 어떻게 이곳까지 이동됐을까. 마치 오래도록 잠을 잔 느낌이다. 이렇게 편안한 잠을 누려본 적이 대체 언제였을까, 싶었다. 그런 단꿈에 취했다고 해도 그렇다고 통증은 어쩔 수 없었다. 


통증을 상상하자마자 극심한 두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통증이 시작된 쪽으로 손을 뻗으며 여기저기를 더듬거리다가 정수리 쪽을 어루만졌다. 심하게 부어있진 않았지만, 이물감이 찾아왔다. 어쨌든 세게 부딪힌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피를 엄청나게 흘린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죽지 않은 걸 보니 다행히 기절할 정도의 충격이었나 보다. 단지 몇 시간의 기억력을 잃을 정도의 미약한 충격.


그때 갑자기 불이 켜졌다. 어딘가에서 이미 구경했을 법한 그런 익숙한 주광색 불 빛 아래에 내가 누워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밝은 곳으로 느닷없이 이동하고 말았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법으로. 


처음엔 온통 하얀빛뿐이었다. 어떤 사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덩어리 형태로 공간이 감지될 뿐이었다. 그런데 옆에 누군가 앉아 있다는 것을 형태로서 인식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 사람은 아귀가 아니었다. 만약 역겨운 아귀가 내 옆에 앉아서 군침이라도 질질 흘리면서 가만히 내 동태를 관찰한다는 상상을 하니, 나는 먹잇감으로서 소름이 끼쳤다. 소화시킬 수 없는 객체로서의 인간을 대하는 기분은 어떨지, 이런 기묘한 상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땠다를 반복하니 시야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왔다.


“정신이 드신 모양이네요” 


낯선 여자의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에서는 어렴픗함과 동시에 익숙한 체계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 여자의 정체를 완벽하게 감각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오직 목소리의 형태만으로 그 여자가 누구인지 밝혀야 했다. 생각에서 명확한 근거를 퍼내려 할수록 통증이 더 극심해졌으므로, 어느 시점에서는 생각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여자가 누군들 문제가 될까. 어차피 나는 지금 안전한 거처로 옮겨진 상태인데.


“혹시 나를 알아볼 수 있겠어요?”


나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최대한 오랫동안 눈동자에 신선한 공기를 주입시키려 노력했다. 그렇게 하면 바깥세상이든 그 여자든 조금 더 분명하게 조망할 수 있으리라. 내 앞에 서 있는 불특정 한 인물의 정체를 벗겨버릴 수 있으리라. 마침내, 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왜 그 여자를 낯설게 느끼지 않았는지 시야가 트이는 순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이군요. 제니퍼! 바로 누하동 피라미드의 당신이었어요. 그런데 이해할 수 없군요. 어떻게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거죠? 내가 당신을 직접 찾아간 건 아니죠?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난 분명 마지막 순간에 아귀의 뒤를 쫓고 있었거든요. 거의 녀석의 소굴을 발견할 직전이었다고요. 혹시 그렇다면 당신이 이곳으로 나를 직접 찾아온 건 가요? 저를 구출해내기 위해? 그런데 저는 당신에게 문을 열어준 적이 없어요. 게다가 당신은 싱크대의 비밀조차 모를 텐데요. 어떻게 된 건가요? 저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네요.”


“그래요 수현 씨. 당신은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곤혹스러울 겁니다. 당신의 범주로는 받아들이기 곤란할 테죠. 뭐, 그래도 세상은 그런 거잖아요. 장마철에 눅눅해져 버린 빨랫감처럼 가끔은 냄새나는 그런 상태를 잠자코 받아들일 필요성이 있는 거예요. 이유를 찾는다고 지금 현실이 딱히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니 의문 따위는 삭제해버려요. 당신은 아귀의 뒤를 밟았죠.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제대로 각성하지도 못한 채로요. 당신은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당신 와이프가 갑자기 집을 나가버렸듯이 당신은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당신은 그럴 때마다 무작정 그곳에 뛰어드는 선택을 감행하죠. 당신의 무모함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지만,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았을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니 그럴 수는 없네요. 어쨌든 용기는 가상했어요.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뛰어드는 것도 용기라면 용기긴 하겠죠.”


“하지만 너무 무모했어요. 내가 개입하지 않으려 했지만, 우린 이미 계약서에 서명을 나눈 그러니까 긴밀한 사이가 됐으니 그걸 방관할 수는 없었거든요. 난 방치해두는 건 딱 질색인 타입이라, 어쨌거나 나는 당신이 창조한 이야기에 잠시 편입될 필요가 있었던 거죠. 사실 그건 소설보다 더 재밌잖아요. 당신이 쓴 소설보다 더 흥미로웠어요. 그래요, 그래서 나는 당신의 영향권 안으로 깊숙이 개입하자고 결심하게 됐어요.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잖아요. 여기든 저기든 세계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짐작할 수도 없지만, 이미 뛰어들었으니 우린 동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러니 우리 이제 협조하는 게 좋겠어요. 당신의 문제든 내 문제든 같이 해결해 나가자고요. 물론 당신은 내 정체가 궁금하겠죠. 도대체 이 인간, 어쩌면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제니퍼라는 여자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갑자기 이곳까지 찾아와서 내 운명에 대해 훈수를 두고 있는 걸까 싶겠죠.”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설명해줄래요? 난 그것부터 알아야 하겠다고요.”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당신한테는 지금 시간이 별로 없다니까요. 아귀는 밤마다 당신을 찾아올 테고 냉장고를 거덜낼 거예요. 냉장고가 텅 비게 되면… 아 그건 상상하기도 싫어요. 그런 날은 절대로 오면 안 되거든요. 그 놈들은 배고프면 무슨 짓이라도 할 놈들이라서요. 그냥 그대로 두면 절대 안 돼요. 무엇보다 집안을 청결하게 만들어야 해요. 놈들은 더러운 것은 제대로 냄새를 맡는 놈들이라. 지금 이 집안 꼴을 보세요.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에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름 깨끗하게 집안을 유지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 여자의 표정은 마치 더러운 돼지우리에라도 들어온 경악스러운 표정이 아닌가. 앗, 그렇다면 이곳이 내 집이 맞을까? 나는 이곳이 내 집, 엄밀히 말한다면 내 집은 아니다. 아내의 소유의 상태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 내 집이라고 우겨볼 만한 구석이 단 하나도 없다. 나는 아내의 재산 형성에 단 1%도 기여한 적이 없다. 나는 인간이 아닌 기생충처럼 아내에게 빌붙어 살았으니까. 나야말로 아내에겐 아귀만도 못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지금 그런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요. 내일 밤에도 아귀가 이곳을 찾아올지도 몰라요. 일단 온 집안 대청소부터 해야겠어요.” 


제니퍼의 선언과 함께 화요일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은 다행이도 제니퍼에게 물건을 배달하는 날이 아니었다. 제니퍼는 집안 구석구석을 닦고 쓸기 시작했다. 마치, 먼지 하나라도 모두 없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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