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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25. 2021

아내가 가출했다 15

제니퍼, 초월적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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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는 마치 우렁각시라도 되는 것처럼 온 집안을 쓸고 닦고 문질러댔다. 마치 이 복잡한 집안 구석에 물건들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완벽하게 아는 사람처럼 또한 이 집과 굉장히 친숙한 사이인 것처럼 깊이 애정 하는 자세로 청소도구들을 차례차례 꺼내들더니 땀을 뻘뻘 흘리며 밀고 다녔다. 제니퍼는 누하동 피라미드에서 본 사람과는 영 딴판이었다. 내가 잠시 동안 관찰한 그녀의 어떤 연예인적 이미지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제니퍼는 베란다며 거실이며 3개의 방과 주방과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감춰진 쓰레기들과 먼지들조차 모두 세상 바깥으로 진출시킬 태세였다. 도대체 왜 저렇게 행동하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상당히 편하긴 했다. 결혼하고 나서 집안 청소는 오로지 나의 몫이었으니까. 이런 품이 많이 들고 돈도 받지 못하는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표 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궁금했다. 그리고 따져 물어야 했다. 아귀의 정체와 그 음침한 토굴, 아귀가 집착했던 음식들과 이 집의 어떤 연관성, 그리고 내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경위에 대해 물어야 했다. 


질문은 세상을 바꿔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 편이다. 현재 벌어진 모든 사건에 대해 누군가에게 묻는다고 과거가 달라지는 일도 미래가 재설계되는 일도 없다고 믿는다. 과거는 그저 세월 속에 쌓인 허술한 모래성 같은 것들일 뿐이다. 그것들은 미래를 절대 그려내지 못한다. 그럴 능력도 없다. 그래도 때로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맞는다. 대답이 뻔하게 전개되더라도 혹은 침묵을 지킨다 해도 나는 묻고 싶었다.


“제니퍼 잠깐 일을 멈추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래요. 내가 일만 너무 열심히 했군요. 잠시 이야기 나눠요. 커피 내릴게요. 거기 식탁에 앉아 있어요”


이 식탁은 아내가 줄곧 앉아있던 공간이었다. 자정이 넘어 도어록을 소리 나지 않게 해제하고 집에 들어오면 아내는 늘 식탁에 앉아서 무언가에 열중이었다. 나를 기다리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과거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아내가 가출하기 직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내는 어떤 곳을 깊이 감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내의 눈앞엔 어떤 예술적인 작품조차 놓여 있지 않았다. 오직 고개를 식탁 앞에서 45도 정도 비스듬하게 틀었다는 것과 눈앞에 부연 안개 같은 것이 서려있다는 느낌만 직감할 뿐이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몽상의 세계에 빠진 아내는 내가 퇴근한 사실도 가끔 깨닫지 못한 채, 마치 명상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골똘히 관찰하는 기묘한 사례가 자주 연출되곤 했다. 나는 일부러 쿵쿵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내 앞을 지나갔으나 아내는 내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나 무신경하게 어딘가로 생각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아무튼 아내는 그렇게 멍하게 어딘가를 응시하곤 했다. 그런데 그 낯설고도 기분 나쁜 식탁에 나더러 앉으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내의 기억이라면 이제 모조리 소각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으니까. 


제니퍼는 싱크대 서랍 장에서 드립퍼와 원두를 찾아내곤 익숙하게 정수기로 우려낸 맑은 물을 커피 포트에 앉혔다. 2~3분가량 낮은 침묵이 흐르자, 두 사람이 마실 분량의 물이 펄펄 끓는 소리를 냈다. 제니퍼는 커피 포트를 조심스럽게 들고 드립퍼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물 온도를 확인하곤 천천히 유산지 위에 물을 흘렸다. 서서히 원을 그리며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입자들의 마지막 운명처럼 물줄기들이 검은 반경을 그리며 아래쪽으로 번져 들어갔다. 구덩이 같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제니퍼는 한 손으로 원을 그리며 주전자 입구를 아래쪽 방향으로 일정하게 휘저었다. 나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또한 던져야 할 질문거리들을 모두 잊어버린 채 구경만 했다. 펄펄 끓는 물이 앓는 소리를 끝내고 검은 가루에서 액체로 재탄생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니퍼의 일기장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니퍼의 일기장?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마치 제삼자의 입장으로 부르고 있었다. 자신을 자신이 아는 객체의 형태로 일반화시키는 이런 건조한 대화기법은 소설 속에서나 구경하던 게 아닌가. 실제 대화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다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편으론 흥미롭기도 했다.


“저는 당신이 아는 그 제니퍼가 아닐 공산이 커요”

“내가 아는 제니퍼가 아니다? 흠, 미안하게도 저는 제니퍼를 잘 모릅니다. 제니퍼는 어제 처음 만났죠. 그런데 내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녀와는 대화 몇 마디 나눠본 게 전부라고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당신이 어제 처음 본 제니퍼가 내가 맞지만 내가 아니기도 하다는 겁니다.”


계속 이 여자는 이상한 이야기를 나에게 던지고 있다. 내 앞에 멀쩡하게 서서 친절하게 커피를 내려주는 여자는 어제 본 냉담한 제니퍼가 분명한데, 스스로 자신이 어제의 자신이 아니라는 역설적인 진술, 어쩌면 그녀는 아주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뭐 이 여자는 제니퍼의 분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하루키의 소설에는 이데이라는 존재가 나오죠?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도 일종의 그런 이데아와 비슷한 감각적인 존재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외관만 존재하는?”

“기사단장 죽이기요? 멘시키라는 기묘한 인물이 나오고 구덩이가 나오는 그 이상한 소설 말인가요? 그래요 거기엔 기사단장이 나오죠. 기사단장은 자신을 이데아라고 표현하고요. 당신도 기사단장과 비슷한 그쪽 계통인가요? 일종의 같은 혈족으로 봐야 하나요? 나 참 어처구니가 없군요”

“물론 이데아 발언은 농담이에요. 그걸 진담으로 들으셨어요? 그런 이데아라는 개념적인 존재는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지 어디 현실에서 가당키나 해요. 수현 씨, 참 몸과 마음이 딴딴하게 얼어붙은 분이로군요. 자, 힘 좀 빼시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이데아는 플라톤의 망상 속에서나 등장하는 개념이라고요.”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죠? 자신이 제니퍼이지만 동시에 제니퍼가 아니기도 하다니, 내가 어떻게 당신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는 걸요?”


“당신한테 깊은 내막을 모두 설명해 드릴 수는 없어요. 다만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당신이 활동하는 주변 환경이 그렇게 꾸며졌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뭔가 인위적으로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무언가를 건드렸거든요. 저는 그게 뭔지 몰라요. 그걸 찾아내면 실마리가 풀릴 텐데… 단지 당신이 몹쓸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사실만 알아요. 제니퍼의 일기장을 보고 알았어요. 당신의 아내가 가출했다죠. 어쩌면 우리가 이 사건을 같이 해결하면 그 사건도 같이 풀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당장 새벽 3시마다 출몰하는 아귀를 막는 게 급선무예요. 녀석은 상당히 굶주렸고 지금은 냉장고만 털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만, 녀석의 굶주림이 어느 쪽으로 향하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이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거예요. 아귀는 지저분한 걸 좋아하는 편이니까요.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뭐 아무것도 안 하는 편보단 훨씬 낫겠죠. 냉장고에 새 음식도 빨리 채워놓아야 하고요. 아귀는 한번 손대 음식은 절대 건드리지 않거든요.”


“인간은 어떤 공통점 때문에 서로 연결이 돼요. 제니퍼와 당신은 어떤 연결고리 같은 걸 가지고 있겠죠. 그 고리가 제니퍼와 당신을 단단하게 엮어주는 거겠죠. 나는 그 사실만 알아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는 개념적인 존재, 초월적인 존재라고 봐도 좋아요. 그렇게 해석하는 게 차라리 이 영화 같은 현실을 뒷받침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귀는 그런 걸 갈가리 난폭하게 찢고 다니는 존재예요. 음식에 맺힌 한을 그런데 풀어버리는 거죠.”


“당신은 전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반복 중이시군요. 공통점과 연결고리라, 연결고리가 서로를 단단히 지탱해준다는 원리를 잘 알고 있지만, 그 연결고리가 어디에서 어떤 이유 때문에 발생했는지 그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는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군요”


“원리는 중요하지 않아요. 단지 사건이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다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미래는 당신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다고요.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처럼 무한대로 관대하지 않다고요. 얼마나 잔인하게 녀석들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지 알아요? 얼마나 가혹하게 내일을 결정해버리는 줄 알아요? 당신은 그런 수행의 경험이 한 번도 없을 테니. 이 거시적 세계의 움직임이 만든 불길한 사건들 그리고 앞으로 터질 미시적 세계의 균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겠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초월적 존재입니다. 지금 당신 눈앞에 있는 제니퍼라는 존재는 당신이 어제 누하동에서 본 제니퍼와는 물질적으로는 동일한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관념적으로는 상이한 존재란 말입니다. 지금 그녀는 아마도 누하동 지하 5층 피라미드 안에서 수행 중일 겁니다. 몽상의 바다에 앉아서 유영중이라는 겁니다. 그녀는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수행 중에 또 하나의 제니퍼라는 존재를 낳았단 말입니다. 그 분신이 바로 나라는 겁니다. 나는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이곳까지 배달되었고 그녀가 수행을 벌이는 동안은 이곳에 줄곧 존재하게 될 겁니다.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한동안 거주하게 되겠죠. 아마도 제니퍼는 수행에서 깨어나도 저를 인식하지 못할 겁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저를 완전하게 지워버리지 않는 이상에는 말입니다. 그게 제니퍼가 이곳에 보낸 전부란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본능적으로 행동하게끔 되어 있어요.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1%도 없으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나를 연예인 제니퍼 대하듯 보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존재하는 한, 또 하나의 제니퍼라는 초월적 존재는 당신과 함께 하는 운명을 내려받은 셈이니까요. 우린 동지란 말입니다. 이 상황을 같이 돌파할 운명을 지나게 된단 말 압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아귀의 소굴에서 구해내야 했어요. 공간을 이동하는 존재가 그런 게 문제가 되겠어요? 하지만 내가 힘을 쓰는 범위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어요. 당신이 만약 무모하게 아귀의 소굴 속으로 더 깊이 진입한다면 그때는 제 능력도 그쪽으로 미치지 못할 겁니다. 반경에서 벗어나게 된다고요. 그러니 어제와 같은 신중치 못한 행동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다면 초월적인 제니퍼 씨 당신은 앞으로 새벽 3시마다 이곳에 나타나서, 아니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겁니까? 우렁각시처럼 어쩌면 새로운 아내가 된 것처럼 내 생활 반경 내에 머무르게 된다는 건가요? 집안일이며 때로는 내 보디가드의 역할까지, 혹시 나와 잠자리도 같이 하게 됩니까?”


“당신이 원한다면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닥칠 상황은 언제든 예고 없이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일단 제니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딱히 그게 손해가 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일이란 지극히 외로움을 동반하는 일이고, 나는 그런 걸 견디지 못하는 부류니까. 게다가 집 나간 아내의 역할까지 대신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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