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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07. 2021

재수 없는 남자

단편 소설

시커멓게 생긴 폭우가 한없이 쏟아지는 밤이었어. 불이 꺼진 사무실에 혼자 앉아서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지. 그렇게 시간이 의미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중이었어. 그렇다고 딱히 일이 진전되는 것도 아니어서 이러다가는 기어코 밤을 또 새우고야 말 지경이었지. 요즘은 통 집중이 안 돼. 모니터를 쳐다보다, 코드 몇 줄을 타이핑했다가 도로 지워버렸지. 하루 종일 세 줄 정도 코드를 짰나 봐, 빌어먹을 도대체 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거야.라고 짜증을 공중에 토해냈지만, 그런 게 말이야. 무슨 이로운 작용을 해주겠냐고.


행색은 뭐 거지 꼴 자체였어. 도대체 며칠을 씻지 않은 건지, 몸에서 음식 쓰레기통에서 나는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니까. 오죽하면 팀원들이 내 근처에 오지도 않았겠어? 뭐, 그런다고 그런 게 상관은 없었어. 팀원들은 어차피 나한테 별 관심이 없었고 난 용병 같은 존재감 없는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이 프로젝트에서 일만 제대로 처리하고 꺼져주면 되는 일이었거든.


밤 11시쯤이 넘었을까. 아무튼 그쯤이었던 것 같아. 대충 그날 일은 마무리를 하자고 결심했지. 배도 좀 고팠고 집에 가서 잠도 잠깐이나마 자야 할 것 같았거든. 과연 잠을 잘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짐을 챙기고 회사 문을 나섰지. 역시나 매섭게 비바람이 몰아치더라고. 칠흑처럼 어두운 밤거리와 퍼붓는 투명한 비바람이라니 아주 잔인한 하루의 마감이었지. 우산을 쳐들었지. 우산살이 여기저기 부러져서 형편없는 몰골이었지만, 어쨌든 포탄처럼 퍼붓는 빗방울을 조금이라도 막아주기만 하더라도 감사한 노릇이었어.


우산대가 꺾이고 뒤집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몰라. 이미 노숙자 같은 내 옷들이 더 비에 젖어 너덜너덜해졌지. 아니, 그렇게 되고 나니까 차라리 더 낫겠다 싶더라고. 아주 시원하게 샤워를 하는 기분이었다니까. 그나마 천만다행이란 것은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어. 며칠 전 회사 근처에 원룸을 하나 얻었거든. 원룸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상 형편없는 녀석이었어. 그 집도 별반 나와 다르지 않았다니까.


한 10분쯤 걸어가면 우리 집이 나와. 이미 온몸은 다 젖어버렸고 우산은 더 이상 우산으로서의 역할을 다했고 뭐 될 대로 돼라 했지. 샤워하듯 물줄기를 온몸에 받으며 걸어가는데 눈앞에 구덩이가 하나 보이는 거야. 그 흔하디 흔한 구덩이 있잖아. 비 오면 움푹 팬 그런 흔해빠진 구덩이 말이야. 그런데 그 순간 철벅거리고 그걸 밟고 지나가고 싶은 거야. 평소라면 훌쩍 뛰어넘어갔을 텐데, 그날따라 첨벙첨벙 발로 꽉 밟아주고 싶더라고. 아마도 그때 나는 온갖 분노를 다 토해내고 싶었나 봐. 세상을 향한 울분 같은 것들. 이해하지 못할 분노를 발걸음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거지.


네가 만약 진 캘리의 ‘Sing in the rain’ 같은 그림을 공상했다면 그건 너무 나간 거야. 그런 낭만적인 그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 이야기를 계속 집중해서 들어줘. 난, 그래서 물구덩이? 뭐 웅덩이든 구덩이든 상관없어. 그 웅덩이를 철퍼덕, 하고 발로 세게 밟아버렸지. 보도블록 위를 지나가는 지렁이를 끝장내버리듯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짓눌러버렸던 거야.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어. 그렇잖아. 보도블록 위에 생긴 물웅덩이가 깊어봐야 얼마나 깊겠냐고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았어. 내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버리고 말았지.


뭐 그렇다고 그 웅덩이가 사람을 잡아 삼킬만한 정도는 아니었어. 그런 건 소설에나 등장하는 이야기잖아. 그런 에피소드를 기대한 건 아니지? 아니 그걸 푹 밟았는데 한 30센티미터는 들어갔나 봐. 분명히 바닥이 나타나야 할 지점, 내 예상과 맞닿아야 할 지점에 그게 없으니까 그냥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던 거지.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그 웅덩이 속이 그냥 전부 진흙 덩어리였던 거야. 물론 비를 잔뜩 머금은 몸이라, 그런 흙탕물에 자빠진다고 딱히 몸이 더 더럽혀지는 것은 아니라서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예상보다 바지에 너무 많은 진흙과 게다가 사람들이 버린 음식 쓰레기 부유물까지 같이 묻어버린 거지. 그걸 아무리 털어내려고 해도 바지에 거머리처럼 척 달라붙어버렸어. 제기랄, 안 되는 놈은 역시 안 되는 건지. 비 맞는 것도 서러운데, 이제 온몸에 흙과 쓰레기로 분장을 해버렸던 거야.


헛웃음이 나왔어. 나 원 참. 재수가 없는 놈은 빗방울로 사워를 하다가도 물웅덩이에 자빠져서 쓰레기로 온몸을 도배하게 되는구나. 아주 어처구니가 없었어.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어서 멍하게 쌍욕을 공중에 대고 퍼부어버렸지, 아주 빽 소리를 질러댔어. '아 씨발, 마음대로 하라고, 얼마나 더 망칠 거냐고! 데려가려면 데려가라고.' 그렇게 말이야. 욕해서 미안해. 갑자기 그때 생각하니까 흥분이 되어서 말이야. 뭘 데려가라고 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뭐 그래도 상관은 없었어. 시간이 지나니 진정은 되더라고 지저분한 바지야 뭐 버리든지 세탁하면 되니까, 그런 게 인생에 얼마나 큰 문제로 작용을 하겠어? 그냥 혼잣말로 짜증을 부리다, 계속 집을 향해 걸어갔지. 마침내 원룸에 도착했어.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는데, 이 녀석이 이어폰 줄과 엉켜서 좀체 나오질 않는 거야. 또 헛웃음이 터져버렸지. 옥신각신하다 겨우 구멍에 열쇠를 넣었는데, 뭔가 좀 이상한 거야? 이게 헛돌아가는 느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거지. 그래서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려봤어. 누군가 안에 숨어있는 거 같았거든.


문을 열었더니 현관 앞에서 센서가 작동했는지 불이 번쩍, 하고 들어오더라. 순간 나도 모르게 놀래서 뒤로 자빠졌지. 아까는 앞으로 자빠지고 그때는 뒤로 자빠진 거야. 아주 쇼를 했어. 근데 집안 꼴이 내 몰골만큼이나 끔찍한 거야. 아주 난리가 난 거야. 침대 서랍, 장롱, 싱크대 서랍까지 누군가 온통 헤집어 놓은 거야. 누가 그랬겠어? 도둑놈이겠지. 그럴만한 짓을 한 게 누구겠냐고. 그런데 그 심각한 상황에서도 난 그게 너무 웃기게 기묘한 거야. 사실, 뒤져봐야 훔쳐 갈 만한 게 전혀 없었거든. 녀석, 누군지 몰라도 허탕 쳤겠어,라고 하며 혀를 찼지.


난 그 녀석 헛수고했겠어. 집을 잘 골라야지. 이런 집을 고르면 어떡해.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신발을 신고 집구석으로 들어갔어. 뭐. 어차피 그렇게 난장판을 피운다고 크게 상관은 없었어. 뭐 버릴 물건들이고 정리해봤자 표도 안 나는 물건들이라. 그냥 내다 버리려고 했거든. 근데 그 순간 현기증이 나더라. 당이 떨어진 거지. 어떻게 그런 상황에 배가 고픈 건지 이해는 안 가지만, 본능을 무시할 수는 없잖아? 냉장고 문을 덜컥 열었어.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어. 냉장고 안에 있던 신라면 번들, 햇반, 만두, 냉동 피자, 게다가 먹다 남은 김밥까지 모두 다 털어간 거야. 와, 진짜 어이가 없었어. 아니 털어갈 게 없다고 아무리 챙겨갈 게 없다고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뭐 상황을 인정해야 했어. 난 포기가 빠른 사람이잖아. 그냥 일단 씻기나 하자. 그렇게 생각했지. 아무리 내가 한 여름에도 샤워조차 월 행사처럼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음식 쓰레기 냄새는 일단 털어내야 하잖아. 그럴 정도로 내가 망나니는 아니라고. 욕실로 들어갔지. 욕실 딸린 원룸을 얻은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욕실로 들어갔어. 그리고 수도꼭지를 틀었지. 와, 근데 무슨 일이 벌어진 지 알아? 그 난리 통에 물까지 안 나오는 거야. 그리고 그 순간에 불까지 나가버리더라. 그래, 정전이 된 거야. 바깥에서 천둥, 벼락이 세상을 뒤집어 놓고 있었으니, 안전할 집이 있겠냐고. 더군다나 이런 보잘것없는 원룸 따위는 더 취약했겠지.


전기도 나가고 물도 안 나오고 먹을 것도 없고. 도대체 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게다가 아까는 몰랐는데 넘어질 때 어디를 다친 건지, 무릎 쪽이 욱신욱신 거리는 거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제야 통증을 인지한 거지. 불행의 연속, 불행은 불운한 자에게 연속된다는 원리를 깨달았지만, 그런 늦은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겠어. 그래서 욕실 바닥에 드러누워버렸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채로 말이야. 그렇게 있으면 언젠가 물이 다시 나올 거 아냐. 그게 언제일지 어떻게 알고 그러냐고? 그건 나도 몰라.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잖아.


며칠이 될지, 몇 시간이 될지, 몇 분이 될지 예측할 수 없었지. 난 불운한 인간이니까.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인간이라서 딱히 기대되는 건 없었지만, 불운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내 꼬락서니를 봐. 서울역 대합실, 의자 밑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내 꼬락서니를 보라고. 이제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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