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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Oct 27. 2021

아내가 가출했다 18

마트, 아귀, 결전의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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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로 몸을 옮겨놓았다. 분명 내 힘으로 걸었으나 나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그저 지팡이 같은 보조장치에 매달린 존재에 불과하다. 어쩌면 택배 박스 같은 외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정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물류센터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만 하는 그러니까 목적지는 분명하지만 본연의 용도를 잃은 배달 용품 같은 신세가 된 기분이 든다. 그래, 나는 유통기한을 넘겨버린, 용도 폐기될 편의점의 삼각김밥과 같은 신세다. 나는 어느 순간 소멸될 날을 기다리는 신세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 처분은 아귀가 대신 내려줄지도 모른다. 아귀는 오늘 밤에도 찾아오겠지. 제니퍼의 말에 따르면 새벽 3시에 아귀에게 따귀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아귀는 나를 구원해 주려나.


차분한 집안 공기 하나가 슬쩍 어딘가로 나를 밀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건 어떨까. 나는 오랫동안 고독에 묻혀 살았지만 고독의 의미를 상실한  채 살아왔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내가 머물 곳은 없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저 나는 색채 없이 살아갈 뿐이었다. 의미 없이 공기를 들이마시고 의미 없이 그것을 내뿜을 따름이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그토록 욕망에 집착했던 걸까. 나라는 존재를 서랍 속에 묻어 두고, 의시 없이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순종적인 존재로 살아왔을 뿐인데, 나는 지금 거죽만 남은 상태가 됐다. 내 앞엔 짧은 목을 몸뚱이 안에 겨우 감춰둔 거북의 등껍질만 보인다. 아주 단단하고 두꺼운, 동토와 같은 세계.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아귀가 모두 먹어치우고 만 것이다. 아귀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편의점 폐기 음식처럼 생겨먹은 이런 쓸데없는 집구석에 왜 찾아온 걸까. 그것도 싱트대 밑, 서랍장 문을 열고 마치 그곳이 비밀통로라도 된 듯이 나타난 걸까. 


아귀가 원하는 것은 음식일까, 그냥 굶주림의 느낌일까. 아귀는 무엇이든지 손에 닿는 건 끝끝내 먹어치운다. 어쩌면 나조차 그에겐 먹잇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그에게 발견되지 않은 것뿐이다. 산 형태로, 그러니까 의식이 환기된 채, 육식동물에게 소화되는 느낌은 대체 어떨까. 그런 감각은 지옥에서나 맛볼 법한 그런 인생 최악의 고통일까. 지금 내가 겪는 중인 그것보다 더 심한 걸까. 아귀의 송곳니에 뼈가 씹히고 으스러지는 상상을 했다. 아귀의 좁다란 목구멍으로 쓸리듯 빨려 드는 공상을 했다. 온몸의 혈관이 눌리고 터지고 관절이 가루가 되는 상상을 했다. 끔찍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귀에게 먹히더라도 아내가 이 집을 나간 이유는 알아야 한다. 그래, 아내는 대체 가출해 버린 걸까? 물론, 이유 없이 나타난 아귀처럼 아내의 외출도 설명할 방법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장을 보러 나가기로 했다. 위기를 모면하는 게 먼저다. 나에게는 살 이유도 있었지만 규명해야 할 사건이 더 크게 부각되어 있다. 그것을 해결해야 아귀에게 먹히든 서울역의 노숙자가 되든 결정이 날 것 같다. 아내가 남긴 흰 봉투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곳엔 5만 원짜리 19장과 지난번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 나서 다시 환불받은 만 원짜리, 오천 원짜리 그리고 천 원짜리와 동전이 뒹굴었다. 나는 그중에서 5만 원 한 장을 윗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었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빈 냉장고에 음식을 가득 채우는 미션을 수행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난 아귀의 식성을 잘 모른다. 그런 건 위키백과를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아귀의 생김새와 그가 굶주린 원인과 실태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설명은 되어있지만, 그런 건 모두 신화나 미신 따위에 속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매체는 거의 없다. 


세상에 아귀 따위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그가 즐겨먹는 음식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곳도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귀의 먹성이 무슨 대수랴. 아귀는 아무것이나 잡히는 대로 입속에 처박아 넣는 것이다. 진공청소기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녀석도 그렇게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뿐이다.


마트로 들어갔다. 입구에 놓인 전단지를 심각하게 살펴보고는 될 수 있으면 행사 중인 것들 위주로 사기로 했다. 주황색 자두가 마침 30% 세일 중이다. 그 옆에선 고구마 한 박스가 1+1 오천 원이라는 가격에 덧붙여 행사 중이다. 카트에 자두 한 박스와 커다란 고구마 두 박스를 담았다. 냉장 코너에서는 요구르트 4묶음짜리 하나와 옛날 소시지 커다란 것을 하나 골랐다. 라면 코너에서는 짜왕 번들 하나, 안성탕면 번들 하나를 골랐다. 군대에서 매달 지급하던 안성탕면이 갑자기 떠오른 탓이다. 그때의 맛이 그리웠던 걸까. 그 시절이 그리웠던 걸까. 알 수 없었지만, 몸이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다. 무뚝뚝 감자칩과 새우깡 한 봉지도 샀다. 


시장바구니에 물건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 입구에 비치된 노끈으로 고구마 박스와 자두 박스를 묶었다. 대충 끈으로 어설프게 휘두르는 게 전부다. 그런 것에까지 굳이 신경을 쓰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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