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여름 들녘이었다. 내 기억은 대체로 넓고 기다랗게 펼쳐지는 논과 밭 그리고 들판의 수많은 초목과 연두색의 수풀, 그리고 매미의 풍성한 메아리 소리, 여치와 메뚜기와 같은 녹색 벌레의 뛰어다님,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탐스러운 열매, 그런 온통 자연의 색채뿐이었다. 그곳엔 인공적인 것도, 불안 따위도 드나들 수 없었다.
나는 잔디밭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등 뒤에선 연두색 풀잎들이 포근하게 나를 감쌌다. 하늘에선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노란 구름이 태양빛에 고개라도 숙이듯 천천히 흘러갔다. 탐스럽고 거룩한 결말이었다.
여름은 뭉게뭉게 둥글게 생겨먹은 솜사탕처럼 어디든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시원하게 파도쳤다. 열기가 바닥과 공중에서 솟아나거나 쏟아졌다. 하나의 열기가 열기 위에 더해지면 여름은 파도 위에 걸친 구름 돛단배를 밀어댔다.
세상엔 아버지와 나 오직 둘 뿐이었다. 옆에 누워있던 아버진 그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석현아, 오늘 저녁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아버지가 그때 왜 그런 말을 남겼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제 존재하지 않은 아버지에게 그걸 물어볼 수도 없다. 그러니까 어떤 이야기들이 구체적으로 오고 갔는지도 도저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를 오직 어떤 장면 하나로서 말하자면 총체적인 분위기로서만 기억할 따름이다. 편안했고 포근했고 풍요로운 저녁이었다. 내 눈앞에선 가시처럼 날카로운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평화로움만이 저녁 한 나절을 밝혔다.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저 시원한 바람은 대체 어디서 불어와서 구름을 밀어내고 있을까 생각했다. 세상은 누군가의 노력 때문에 돌아간다. 흘러가는 하늘의 정처 없는 구름도, 세상의 끝에서 시작된 시원한 여름 저녁의 바람도, 끝도 없이 펼쳐진 논과 밭의 풍요로운 풍경도 누군가 펼친 노력이 없었다면 절대 기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때는 내가 7살 무렵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쩌면 6살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이 따위는 중요한 정보가 아니다. 그날은 아버지와 단 둘이서 외갓집을 가는 길이었다. 왜 둘이서 외갓집을 갔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한동안 집에서 지낼 수 없다는 기억 하나만은 확실하다. 나든 동생이든 한 사람은 외갓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유익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적어도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애로사항을 겪게 되지 않을 테니까. 아이였지만, 나는 그런 사항에 대해 불만도 불평을 해대 지도 않았다. 뭐, 외갓집에서 몇 달 지내는 게 무슨 대수냐고. 거긴 게다가 시원한 우물도 있는데.
아무튼 신내동 17 번스 종점에서 내리면 꽤 먼 길을 걸어가야 했다. 논길을 따라 먼 길을 돌아가든지 다소 가파른 산길을 넘어가든지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보통은 논길을 따라 천천히 우회하는 편이었다. 산길을 왜 피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선택은 나와 상관없었으니까.
그날은 폭이 아주 좁은 산길이 선택됐다. 좁다란 산길을 따라 작은 시냇물이 같이 흘렀는데 높은 곳을 넘어가면 오른쪽에는 배밭이 우거졌다. 나는 배밭을 주변으로 왜 철조망이 그곳을 가로막아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신문 종이에 쌓인 탐스러운 열매를 상상하며 숨겨진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름답고 탐스러운 것은 언제든 인간에 의해 망쳐질 수 있으니까.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너무나 쉽게 파괴하는 편이니까.
오른쪽에는 철조망이 둘러싼 배밭이 왼쪽에는 마을 공동묘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공동묘지라지만 그다지 두려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죽음이란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언제든 찾아올 공평한 것일 텐데, 저기 높은 곳에 듬성듬성 놓인 죽은 사람들의 자리에서 어떤 섬뜩한 사건이 벌어질 거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 옆에는 든든한 아버지가 있지 않은가.
묘지가 다소 늘어서 있긴 했지만, 그곳은 어쨌든 깊고 깊은 산중의 산이었다. 삼나무, 전나무, 소나무가 가득한 초록의 장엄한 채색이 길고긴 침묵처럼 이어졌다. 언제부터 그곳이 숲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곳은 깊고 푸르고 넓기만 한 공간이었다. 왼쪽 산등성이를 바라다보면 그 너머로 또 다른 산이 삐쭉 튀어나왔다. 그것은 끝이 없는 또 다른 녹색 오케스트라의 협연이었다.
마치 아주 큰 신선들이 검은 머리를 하고서 계속 줄을 지어 누군가를 맞이하는 것 같은 느낌, 산은 신선이 몸을 감추고서 푸른색의 장발을 저렇게 휘날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때의 나는 메말라버린 입술을 축이며 상상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가며 오른쪽을 한 번 쳐다보고 왼쪽을 한 번 쳐다봤다. 어딘가를 본다는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중간쯤 내려갔을까. 아버지가 잠시 왼쪽 산 중턱 잔디에 앉아보자고 말했다. 잔디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니 눈앞에선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푸른 논과 밭이 짠 하고 물감으로 방금 칠한 것처럼 나타난 것이었다. 부추, 벼, 그리고 고추밭이 그곳엔 또 하나의 무대 장치처럼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집, 굴뚝에서는 저녁밥을 짓는 것인지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굴뚝에서 슬며시 나타나 하늘로 사라지는 그 연기의 동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해는 점점 꼬리를 서쪽으로 감추고 있었고 어느새 더위도 사라져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 아마도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시간이 한 참 지나도 오늘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잊지 말라고.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잊어도 된다고. 다만 늦은 오후의 평화로운 풍경만큼은 잊어서는 안 된다고. 힘든 날도 저녁이 있어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고. 힘든 날이 저 산처럼 짙고 푸르게 우거져 있어서 내 길을 가로막을지라도 헤쳐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눈앞에 환한 길이 나타날 거라고, 그러니 지금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이렇게 저녁이면 산 중턱에 올라 아무렇게나 바닥에 턱 자리를 깔고 앉아 넓고 푸른 들녘을 바라보면 모든 게 다 사라질 거라고, 아마도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물론 그 기억은 왜곡될 수도 있다. 미워했던 아버지를 미화시키려고 내 기억이 거짓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건 아무도 모른다. 그래야 나라는 인간이 대체로 무사하게 살아갈 일이 될지도 모를 테니까. 설령 그 늦은 오후의 장면이 모두 거짓이었거나, 그럴싸하게 포장된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분명 그날 저녁 내 시야 안에 가득했던 것들은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마치 한때였지만 다정했던 아버지의 얼굴처럼.
미워했던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어서
어쩌면 화해란 것을 청해보려고 글을 썼습니다.
브런치북을 발행하고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던 한 장면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마지막일 것 같아서
그 이야기를 쓰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제 종결하려고 합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모임 운영자가 아닌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fat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