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보고...
광활한 대지는 지구의 살아 숨 쉬는 모든 동식물이 자라나는 생명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가이아 여신의 자애로움을 상징하는 대지는 생명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 차별 없는 나눔, 풍요로운 안식처를 상징한다. 대지는 생명과 함께 살아 숨 쉰다. 대지는 생명을 사랑했고, 생명들이 곧게 자라날 수 있도록 흙과 물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인간들은 기꺼이 자신의 한쪽을 떼어준 대지의 헌신을 비웃었다. 이미 소유할 것들을 충분히 불렸지만, 인간들은 만족에 겨워하지 않고 더 큰 마약과 같은 쾌락의 대상을 좇았다. 인간들이 욕망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타인의 소유를 빼앗는 것'으로 만족의 범위를 넘어 과욕을 부렸을 때, 대지는 이제 자애로움에서 먼발치로 물러나 있었고, 인간이 가진 한정된 자원을 서로 빼앗고 뺐는 욕망들에, 자연은 인간들에게 잔혹한 응징으로 화답했다.
인간이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회의 대륙 - 아메리카 신대륙 - , 새로운 대지를 밟은 자들 간의 욕망... 탐욕스러운 인간의 본성에 관한 처절한 다툼을 다룬 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제목은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다. 자연의 규모 앞에 압도당하는 작은 인간의 복수를 주제로 이어지는 이 영화는 짙은 안개처럼 시종일관 어둡고 탁하다.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잔인함, 인간들끼리의 배신, 월등한 무기와 과학 기술로 무장한 다른 인간에 대한 지배, 새로운 대지를 차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그 땅의 주인이었던 토착민 - 인디언 - 들을 살육했던 백인의 검은 그림자와 허연 민낯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야기는 풍요로움의 상징인 광활한 대지를 중심으로 하여 낮은 그림자처럼 어두운 서사를 짙게 펼친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멕시코 태생으로 전작 <21그램>, <버드맨>등을 통해서 인간들의 오래된 본성인 추악함, 잔인함, 끔찍함의 정서를 공통적으로 다뤘다. <레버넌트> 역시 전작들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레버넌트>는 미국 동부, 서부개척시대에 벌어진 역사적인 인물을 실제 모티브로 삼았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는 한 남자의 끈질긴 복수극이다.
'휴 글래스'를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 영화를 통해서 그의 첫 번째 오스카 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선이 굵은 남자이자 아버지의 부성을 제대로 보여줬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육신을 뒤덮어버렸을 때, 삶의 희망이 소멸되어 더 이상 나직이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을 때, 그를 잡았던 구원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압도적인 자연의 힘 앞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다. 거대한 회색곰(그리즐리)과 마주했을 때, 그의 소름 끼친 사투 앞에서 나는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휴 글래스'는 19세기, 서부 개척시대에 모피 원정대가 이끄는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획득한 모피를 운반하던 과정 중에 벌어진 참혹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역사적으로 당대에 모피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확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는 와중에 벌어진 무분별한 모피 사냥에는, 오랫동안 거주했던 인디언들의 세상이 외부의 인간들에게 찬탈당한 역사, 그들의 목숨이 끔찍한 살육과 함께 사라졌음을 증거 한다.
백인들은 모피를 위해 인디언 원주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백인 모피 상인들은 단지 모피 사냥을 위해서 인디언들을 살육했으며, 그들의 자연까지 파괴했다. 결국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말살하는 것으로 간주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침입한 백인들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휴 글래스는 자신을 저버린 동료에게 복수하겠다는 집념 하나로 자신을 저버린 대지에서 버텼다. 회색곰과의 사투로 인하여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복수심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처연했으며, 자가 치유를 하며 버텼다. 그가 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을 붙들고자 하는 강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삶을 향한 의지를 놓지 않았던 순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직 하나의 생각, 자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 그 이유 하나만을 머릿속에서 수천번 되새겼기 때문이었다.
감독은 광활한 자연과 대면한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극명하게 대비하면서, 극악의 환경에서도 인간의 생명이 꺼질 듯 사그라들지 않는 처절함을 보여준다. 광활한 자연 앞에서 관객은 숨도 못 쉴 정도로 규모에 압도당한다. 규모에 맞선 한낮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복수심은 그 존재를 드러내기도 힘들다. 그 압도적인 자연의 품안에서 고이 간직한 복수심은 광활한 대지의 신비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낮 미미한 소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 땅에서 일어난 과거의 복수와 죽음을 감독이 다시 불러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가족의 복수를 위해 버틸 수 있었던 아버지의 한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일까? 감독은 어쩌면 과거에 드넓은 대지에서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과 동물의 죽음을 다시 살려내어,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삶의 의미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단지 휴 글래스가 살아 돌아와서 복수한 것이 감독이 전달하는 궁극의 메시지는 아닐 것이다. 오래된 땅에서 수없이 죽어갔던 망령들이 영화로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자신을 배신했던 '피츠제랄드'를 향한 복수에 성공하여 그의 목숨을 거뒀을 때, 그의 내면에 안식이 찾아왔을까? 꺼질 것 같던, 삶의 불씨를 살려 결국 마지막 끝장 혈투에서 승리한 자신과 가족에게 과거의 빚진 용서를 구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다시 한번 삶의 의미에 관한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아래와 같은 강렬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진다.
'삶의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으며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