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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pr 05. 2022

절망은 하루키의 말처럼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입구는 출구요, 절망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굳은 시체에 열정 불어넣기를 반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썩어가는 몸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환상을 끝없이 다르게 반복한다.

《1973년의 핀볼》


싱겁고 느슨한 모임 속에서 느리게 반응하고 성기게 대화하며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꽤 먼 곳으로 꽤 가파른 곳으로 떠밀려 온 것만 같다. 대화의 간격 속에 묻어 나온 세월의 간격이 까마득해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현기증이 일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두리번거린다. 무언가 한참이나 잘못된 듯싶어 절망스럽기도 하고 절망이 아무렇지 않기도 하다.

《시옷의 세계》


구글킵 검색창에서 '절망'이라는 단어를 입력했더니 절망이 묻어 있는 수많은 한숨들이 튀어나왔다. 사실 나는 '절망'을 검색하려던 게 아니었다. 내가 검색하려던 단어는 '실망'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비의도적인 이유, 어쩌면 무의식의 발로 때문에, 어쨌든 절망을 검색하고 말았다.


내가 굳이 부정적인 단어인 '실망'을 검색하려던 것은 지금 이 순간, 내 감정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심연 어딘가를 바깥쪽에 객관적인 형태로 투사하고 싶었고 또한 스스로 공감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현재 중요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어젯밤 10시를 넘어 퇴근하는 시간, 버스에서 하차하기 직전, 나는 교보문고의 판매 동향을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치 않은 어떤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그날따라 재고 현황을 전혀 모니터링하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결정을 덥석 낚아버린 것이었다.


차라리 확인하지 말걸, 어제까지 분명 재고가 10권이었는데, 단 한 권으로 재고가 줄어들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독자의 선택에서 멀어졌다는 얘기, 서점 MD의 단호한 판단에 따라 매대에서 즉결 처분되었다는 얘기, 사실 이런 경험이 한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마음에서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벌어질 사건이 단순히 터진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컸다.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세상은 원래 냉정한 것이 아닌가,라고


그럼에도 내 마음은 차분하다 못해, 바다 밑바닥 뻘을 긁어내듯 어느새 그곳을 기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출근하자마자, '실망'이 아닌 '절망'을 검색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루키는 절망이 입구가 아니라 출구라고 말한다. 절망은 굳은 시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시체에 열정을 불어넣어야 한다. 삶은 어제처럼 절망적인 결과만을 보여주지 않으며, 이런 고민을 하는 중에도 시간은 냉정하게 흐르는 중이니까. 물론 삶은 매일 절망적인 것들을 계속 전시해 줄지도 모른다. 견딜만한 절망인지, 감내하지 못할 절망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절망은 삶에서 작고 크게 여러 형상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분명한 진리다.


나는 직장인이다. 하지만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회피하며, 그 모순적 외피를 걷어버리고 싶어서 글을 썼다. 예전에도 블로그에 글을 쓴 적이 있지만, 글을 쓰고 작가로서 책을 출간하고 외부에서 강사 활동을 한들,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늘어나고 피로는 더 가중된다. 막중한 짐만 더 늘어나니, 어쩌다 보면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방황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오늘처럼.


김소연 시인의 말처럼 절망은 나를 쓰러뜨리기도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접하는 삶의 모든 단어에는 중의적인 표현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절망의 반대인 희망조차, 희망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과 희망을 꿈꿀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좌절하게도 들뜨게도 하니까. 세상의 모든 단어에는 저마다의 뜻,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감정에 달려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나는 작가로서 글을 쓰고 그것을 콘텐츠로 만드는 사람이다. 콘텐츠는 전쟁이다.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고 인터넷을 통해 그것을 쉽게 유통하는 시대다. 물론 이 싸움은 내가 주도하는 것이며, 타인과의 경쟁이 아닌 나 자신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저자로서 잠시 실패했다는 사실. 그래서 절망하게 됐다는 감정을 교묘하게 은폐하는 게 맞을까. 그것을 당당하게 외부에 보도하는 자세가 맞을까. 어떤 판단도 나 자신을 속이거나 왜곡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황에 제대로 직면하려면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나의 선택이다.


교보문고 매대에서 책이 치워졌다는 사실 하나에 실망하거나 절망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다 때려치우고 침대에 누워 믹스넛이나 하루 종일 씹어대는 게 훨씬 내 몸에 유익할 것이다.


나는 오늘 꽤 솔직하려고 애썼다. 솔직함이야말로 작가가 가져야 할, 글로 인생의 나머지 페이지를 채워나가야 할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보문고 매대에서 사라진, 그러니까 냉정한 심판을 받은 내 세 번째 책의 작은 절망을 앞에 두고서도 이렇게 냉정함을 되찾으려 어제 하루를 회고하고, 오늘을 새롭게 대비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그 감정을 잊지는 않되, 성찰하고 또 오늘이라는 하루를 선물처럼 보내는 것이다.


나는 가끔 절망을 겪지만, 절망을 쉽게 잊는 어쩌면 부정적 감정의 치매를 앓고 싶다고 희망해 본다. 그리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시 목록에서 추려보는 것이다.















교보문고 광화문점 매대에서 사라진 나의 책


https://bit.ly/1000gs_50_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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