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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마감을 4일 앞둔 오후 길박사와 점심 약속을 했다. 길박사의 연구실 근처인 신촌 근처에서 보기로 한 것이다. 회사에는 현장 조사 관계로 외출하겠다고 보고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딱히 그러고 싶진 않았다. 현재 우리 팀의 매니저는 공석인 상태고(퇴사) 사실상 나는 거의 내 마음대로 스케줄을 잡고 빨랫줄처럼 일을 당겼다가 놓았다 하는 형편이니까. 내 행동에 대해 어느 누구도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나는 회사에서 완벽한 자유를 누리는 중이다. 적어도 제안서 쓰는 일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신촌 로터리에서 만난 길박사는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상당히 뭔가에 고무된 사람처럼 보였다. 중요한 국가 프로젝트라도 성사시킨 걸까? 이대로라면 아무리 까다로운 길박사일지라도 뭔가 유용한 정보를 끄집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리라. 아무튼 길박사는 4거리 대각선 건너편에서부터 두 손을 들고 크게 흔들며 나와의 만남을 크게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겉으로는 적어도 그 환대에 반응하려 나름 성심성의껏 노력했지만, 그렇게까지 친한 사람처럼 의도된 행위를 보여줘야 하는지 이해하기 곤란하기도 했다.


길박사는 나와 마주치기 무섭게, 그 두껍고 스타워즈에 나오는 추바카의 털 뭉치 같은 손을 내밀며 내 손을 아주 크게 흔들어댔다. 반갑다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파편을 튀기며 물었지만, 사실 그의 이야기는 하나도 내 귀에 흡수되지 않았다.


자신이 근 몇 달 동안 진행하던 중대한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 결과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을 오늘 오전에 받아냈으며, 적어도 몇 년 동안은 걱정 없이 그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다며, 자신이 박사라는 사실이 인쇄된 명함에 걸맞은 일을 하게 됐다는 그런 자화자찬 일색의 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희소식에 최대한 크게 리액션을 가하며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칭찬이 담긴 표현을 서슴지 않아가며, 마치 아마존 밀림에서 숨어 있던 새로운 생물체를 발견해낸 탐험가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 우린 끈적한 포옹이라도 나눠야 했을까?


반가운 인사 이후 예의 그만의 작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가 말한 비밀스러운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사건의 진상을 듣고 나서는 나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잘 몰랐지만…


그가 안내한 곳은 신촌의 어느 은밀한 중식당이다. 간판에는 분명히 중식당이라는 글자가 찍혀있긴 했지만, 그곳은 엄밀히 말한다면 중식당이 아니라 분식집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할 정도다. 중식당인지 분식집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빨간 명패가 걸린 식당에 우리는 자리를 잡고 불편한 자세로 앉았다.


어떤 메뉴든 골라도 괜찮다고 말해놓고 길박사는 1초의 고민 없이 짜장면 일반이라고 주문서에 적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나는 그의 명석한 판단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어떤 메뉴를 고를 것인가, 라는 고민은 이곳에서 적어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고 안도했다. 그리고 작대기 밑에 또 하나의 작대기를 추가했다.


그렇게 메뉴를 선택해야 하는 복잡한 프로세스를 거칠 필요 없이 결정이 단 한 방에 이뤄지자, 길박사는 자신의 박사라는 무게에 걸맞게 주문서를 받아 드는 종업원에게 '만두는 서비스로 주나요?'라고 물었다. 언제부터 중국집이 자장면 두 개를 시키면 만두를 서비스로 주는 걸까? 음, 신촌에서는 그게 국룰일지도, 만약 그게 룰이라면 따르면 그만이 아닌가.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질문 자체가 허락되지 않지만… 박사는 짜장면을 한 그릇 시키고 나는 덤으로 만두 4개를 공짜로 먹는다. 그게 박사와 신촌이 만든 협정이다.


짜장면이 나오자마자, 길박사는 짜장면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면과 양파와 온갖 걸쭉한 양념과 기름기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길박사의 정수리와 목덜미뿐이었다. 한 인간이 짜장면 한 그릇을 얼마나 빠르고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지 그는 체험의 현장으로서 나에게 시연했다.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한 내 짜장면을 그에게 양보해야 하는 건 아닌지 순간 고민이 들기도 했지만, 그가 막 면치기를 끝냈을 때, 추가로 짜장면 곱빼기를 더 주문하는 장면을 보고, 마음에 잠시 일렁였던 양보란 것은 접어두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


사실, 나는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시점에서 그날 길박사와 나와의 만남이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시점에서 나는 어떤 확신을 타인에게서 얻고 싶었던 것 같다. 내 안에 이미 정의되어 있는 인생의 방향 같은 것들을 아무런 연고도 없고, 그저 잠시 잠깐 프로젝트를 동료로서 함께 한, 말하자면 타인에게 조언을 듣는 것이 아닌, 간접적으로나마 내 생각을 더 확고하게 다지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 의미도 없는 실체를 통해서.


식사가 끝나자, 그는 바로 폭풍랩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방송이 종료되자마자 마치 숨겨둔 후일담을 전하는 연예인처럼 말이다.


“홍대리님, 제가 아까 중대한 프로젝트가 결정됐다고 말했잖아요. 그게 뭔지 알아요? 하하하. 아마 대리님은 중대한 그 무엇이 박사라는 직함에 맞는 연구과제 같은 거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셨으면 예상이 완전하게 빗나간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과녁을 잘못 보고 화살을 쏜 거라고요. 하하하. 아마 제 이야기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천재는 사람을 놀라게 만들죠. 쇼펜하우어가 말했잖아요. 천재는 보이지 않는 과녁을 쏘는 사람이라고요. 말하자면 지금 제 눈앞에 과녁을 만들고 아무도 관심 없는 그 과녁과 저와의 거리를 조율하는 중이라고요. 홍대리님은 이제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그래요? 저는 당연히 수십억 짜리 연구과제에 선정되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엉뚱한 판단을 했군요. 그럼 말씀하신 중대한 프로젝트의 정체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과녁의 정체도 점점 궁금해지는 걸요? 오늘 제가 길박사님을 만나자고 한 이유는 사실 연구과제에 필요한 제안서 건이었는데…” (지가 천재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군요. 제안서 작성이라… 그런 건 매일 밥 먹고 하는 짓이라 딱히 노하우나 개념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데, 저한테 정보를 얻어 갈 게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제안서 이야기는 나중에 제 연구실에 가서 나누기로 하시고 일단 제 말씀을 좀 들어봐 주세요. 의견도 좀 주시고요.”


“네… 일단 그래 보죠.”


“중대한 프로젝트는요. 홍대리님도 알다시피 제가 신촌의 소문난 미식남이 아닙니까? 이 신촌 근처의 맛집이라는 맛집은 제 입을 거쳐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죠. 신촌에서 음식으로 장사를 하려면 제가 일종의 스탠더드가 아니겠습니까? 제 기호에 맞추지 못한 곳은 장사할 생각을 아예 접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까다롭고 철두철미한 음식에 대한 철학을 가진 제가 음식이라는 아이템을 놓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제가 어쩌면 요식업에 종사하겠다고 무작정 뛰어드는 일이 이 박사라는 학문적 성과에 이르는 데 도움은 주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취미적으로는 꽤 그럴싸한 일이 되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혹시 언젠가 해변가 옆에 길박사 조개집을 차릴 수도 있는 노릇이고요.”


“이야기의 요지가 무엇인가요? 핵심이 없는 길로 자꾸만 빠져드는 기분이 들어요. 1막에서 권총을 보여주셨으면 이제 3막으로 넘어가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셔야죠. 일단 총을 쏴야 피하든지 맞고 쓰러지든지 할 거 아닙니까?” 내가 다소 짜증 나는 투로 말했다.


“하하하. 홍대리님 성격 급하시네요. 오늘 오후에 저 시간 많습니다. 홍대리님은 혹시 회사에 복귀하셔야 되나요? 음, 대리 신분이라면 시간적 제약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3막으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아, 보드카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홍대리님은 술 안 드시죠? 고량주 한 병 시켜도 될까요?”


“네 시키세요. (암요 암요 어차피 위대하신 길박사님이 계산하실 텐데요.)”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제가 유튜브 시작한 거 모르셨죠?”라고 길박사가 말했다. 당연히 모른다. 그런 폭탄 터질 일을 내가 알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이 유튜브를 하건, 야동을 찍건 관심 없다. 유튜브 뭐 그래서 어쩌라고? 나더러 장비 지원이라도 해달라고?


“제가 음식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재능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먹는 일이죠. 쩝쩝거리며 게걸스럽게 먹는 것에 관련해서는 저를 이길 사람이 없겠더라고요. 저는 마이크가 없어도 입과 혀만 가지고 ASMR을 찍을 정도가 아닙니까. 제가 쯔양과 비교해서도 뒤질만한 구석이 없더군요. 쯔양이 초밥 접시 100개를 먹었다고 하던데, 저도 그 정도의 양은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거든요. 그래서 나도 그 비교 우위성을 놓고 사업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요? 당연히 먹방을 시작했죠. 남몰래 말입니다. 시작한 지 넉 달 정도 시간이 지난 것 같아요. 일주일에 적어도 두 편의 비디오를 올렸죠. 구독자가 꾸준히 오르더니 오늘 아침에 드디어 천 명을 넘어섰고 시청 시간도 4천 시간이 넘었더라고요. 광고를 올릴 수 있는 시점이 된 거죠.”


“아, 길박사님이 말씀하신 중대한 프로젝트란 것이 유튜브 구독자 천 명과 시청 시간 4,000시간 돌파로군요. 와, 이거 축하드립니다.”라고 나는 마치 대본에 적힌 대사를 무색무취의 음성으로 그러니까 초보 연기자가 발음 연기를 처음 하듯이 말했다.


그래, 충분히 축하받을 일이다. 길박사는 박사로서 미래도 촉망되고 유튜브 먹방러로서도 미래가 촉망되는 인재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나는 골방에 처박혀서 코드나 주물러대다가 제안서를 쓰게 됐는데, 그는 옆걸음질을 치다가 먹방러로서도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되다니. 난 어느 곳으로 가야 하려나.


그의 성공 가도를 물론 축하해 줬다. 물론 진심은 담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엔 질투나 시샘을 담지 않았다. 그거 꽤 힘들다. 왠지 점점 조급해지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연구실에 돌아가 신나는 감정에 흠뻑 취해있는 그를 유혹해서 제안서 뭉치라도 하나 뺏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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