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숨 막히는 짜장면 파티가 종료된 후, 우린 길박사의 연구실을 방문하기로 했다. 길박사는 자신의 연구실도 구경하고 나교수와 잠시 인사라도 나누며 안면이라도 트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흠,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 어색한 분위기에서 그러니까 다소 인공적인 분위기에서 인사를 나누는 게 딱 질색인 편이지만, 어쩌면 나교수에게 나의 존재감을 한 번쯤 드러내는 것이 굳이 나쁜 생각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상황을 급선회하기로 했다. 사람의 운명이 어찌 될지 아무로 모를 일이 아닌가. 나교수는 길박사보다 제안서에 관련해서는 더 전문가일 테니까. 이런 게 영업이려나?


연구실이 위치한 대학원 건물을 향해가는 길, 교문을 통과하여 안쪽으로 진입하는 데,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이 훨씬 많다. 나와 그들의 겉 표정은 비슷해 보여도 마음 속의 결이 서로 다르듯이, 우린 각자 다른 모양의 운명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리라. 하지만 문제는 내가 가진 운명엔 이렇다 할 특징적인 게 존재하지 않는다. 각별한 냄새도 소리 따위도 없다.


교내 어느 먼 곳에선, 마치 군대 연병장에서나 들릴 법한 그런 촌스러운 라데츠키 행진곡 같은 게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분위기와는 달리 그다지 기분이 고조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걷다 보니 대학원 건물 앞에 다다랐다. 연구실이 3층이라 충분히 계단을 이용할만했지만, 다이어트 프로그램이라면 딱 질색이라는 길박사의 취향 덕분에 엘리베이터에 무임승차하게 됐다. 물론 엘리베이터 타는 게 코인 노래방처럼 동전을 넣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세상 어느 곳에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언제 희귀한 물건이 될지도 모를, 내 소중한 동전 하나를 바친단 말인가. 그냥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만.


길박사는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누르고 4층에서 천천히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런데 마치 세상의 모든 시계가 동시에 숨이라도 멎은 것처럼 분위기가 어느 순간 급속하게 가라앉았다. 나도 길박사도 어떤 공통적인 화젯거리라고 여길 만한 대화의 요소가 바닥나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딱히 아무 얘기나 꺼내서 그 어색한 분위기를 종결시키고 싶지도 않았으니, 나는 머릿속으로 빨리 제안서 샘플을 하나 낚아채고 집이든 사무실이든 복귀할 생각만 가득했다.


머리 위에 빨간 숫자 1이 찍혔다.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것이다. 우린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마치 지하철 플랫폼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안쪽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핸드백을 투척하는 아줌마처럼 대기 자세를 취했다. 그만큼 우린 엘리베이터 승차에도 진심인 셈이다. 길박사는 짜장면에도 진심이고 유튜브 먹방에도 진심이다. 그렇다면 그는 제안서 쓰기에도 진심일 확률이 아주 높다. 상황이 꽤 긍정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측이 전두엽을 부드럽게 쓸고 스쳐갔다.


문이 열리는데 이상하게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안쪽에서, 마치 볼륨을 서서히 키우듯 밀려들어왔다. 아주 유쾌하고 흥에 겨운 그런 목소리. 그러나 그 즐거운 목소리에는 이해할 수 없는 석연찮음 같은 분위기가 서려있달까. 그럼에도 나는 그 안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다. 소리란 것은 어디에서나 예기치 않게 흘러들어오는 것이고 그 주파수의 성질도 사람마다 꽤 비슷하지 않은가. 그리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나는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귀에 익은 것에 담긴 불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 김대리 무슨 일이야?”라고 허공, 아니 안쪽의 정체 모를 인간에게 말했다.


그래,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김대리와 나교수가 화창한 봄날에 즐거운 피크닉이라도 다녀올 사람처럼, 말하자면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처럼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내 목소리와 표정에 김대리가 잠시 움찔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마치 바이어와 중요한 약속이라도 맺은 사람처럼 나교수와 함께 나와 길박사 사이를 통과해나갔다.


물론, 나 교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잠시 회의 석상에서 명함을 주고받은 적은 있지만, 그는 유명 인사고 나는 그렇지 않다. 나와 같은 부류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 생존하지 못한다. 그런데 김대리까지 내 존재에 대해서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눈치다. 나교수가 잠시 고개를 쑥 내밀어 나를 위에서 아래까지 스캔하듯이 훑어보긴 했지만, 그것은 화성에 살지도 모를 그런 하찮은 미생물 따위를 바라다보는 관찰자의 위치와 비슷하달까.


내가 갸우뚱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돌리자,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길박사가 눈치 없이 말을 걸었다. “아 맞다. 김대리님이랑은 회사 동료죠? 그런데 왜 아는 체를 안 해요?” 길박사는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며 범죄 현장 앞에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말했다.


김대리가 왜 나교수랑 갑자기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처럼 내려오는 것일까. 버그 처리하느라 바쁘다던 김대리가 이곳 신촌에, 또 길박사 연구실 앞에서 싱글벙글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내가 방금 목격한 존재는 김대리가 아닐 수도 있다. 김대리와 비슷하게 생긴 또 다른 인간의 한 유형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미심쩍다. 김대리가 아닌 또 다른 형태의 김대리일 거라는 가정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김대리가 나교수와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 뭔가 낌새가 심상치 않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슬쩍 김대리에게 깨톡을 보내봤다. “무슨 일이야? 나교수 랩엔?”이라고 보냈으나 숫자 1은 오후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더 불길해졌다. 뭔가 나쁜 정황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는 게 분명했지만, 난 그 기분 나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방법이 없다.


“아, 그렇고 보니 홍대리님도 나대리님도 왜 그렇게 제안서 가지고 난리인 거예요?”라고 길박사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말했다.


“네? 제안서 가지고 난리라니요?” 나는 웬 꿀단지에서 남몰래 꿀이라도 퍼먹어 대는 곰 같은 소리를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이해할 수 없다는 눈매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일주일 전에 김대리님이 여기 연구소를 찾아온 거예요. 나도 아니고 다짜고짜 나교수를 찾아왔더라고요. 근데 김대리 손에 나교수가 좋아하는 밸런타인 17년 산이 들려있지 않겠습니까? 뭔가 단단한 궁리를 갖고 청탁이라도 하려고 온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죠. 아무리 눈치가 없는 얼간이라도 그 정도는 다 알잖아요.” 황당하다며 이제야 내가 자신을 찾은 이유를 이해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길박사가 말했다.


점점 더 어이가 없어지고 있다. 뭔가 수상한 쪽으로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고 있다. 뭔가 공작이 시작되고 있는, 아니 한참 진행 중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엔 내가 모르는 일들이 은밀히 돌아가는 중이라지만, 이것은 바로 내 칸막이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펼치는 일이 아닌가.


“일단 연구실에 가시죠” 길박사가 황당한 내 표정에 담긴 뜻을 납득이라도 할 것 같은 자세로 말했다.


우린 길박사의 연구실로 돌아가, 진한 커피 믹스를 한 잔씩 타놓고 자초지종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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