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내가 놓인 상황은 명확하다. 나는 지금 명백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위기가 아닐지라도 나는 현 상황을 위기에 준하는 급으로 산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위기에 발휘해야 할 중대한 프로세스를 긴급 발동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이런 위기를 예측한 적도, 위기에 반응하기 적당할 만한 매뉴얼 따위를 설계해 본 적도 없다. 그러니 나는 현재를 단순한 위기 상태로 격상시킬 뿐, 어떤 근본적인 대책도 임시 해결책도 없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식만 할 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나뿐인데, 요즘은 나 자신을 통제하기가 더 버거워졌다. 내가 나지만 때로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은, 때로는 내가 김대리인지 홍대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괴한 혼란스러움에 빠진다. 나는 마치 기획능력을 영영 상실해버린 기획자가 된 기분이며 하루에 담배 세 곽을 피지만 담배 피우는 습관을 잃어버린 얼간이 골초가 된 것 같다. 물론 담배를 피워본 적도 기획 일을 경험해 본 적도 없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나 자신을 잃은, 말하자면 등 껍데기를 잃어버린 소라게가 된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시시콜콜한 일들을 김대리와 자주 상의하는 편이다. 김대리는 무엇보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내가 늘어놓는 온갖 푸념과, 회사에 대한 불평불만들을 끝까지 들어주고 때로는 냉철한 조언까지 아끼지 않는다. 얼마나 귀가 따가웠을까.


지난달에는 연구소 팀원이 모두 모인 회의 석상에서 즉흥적인 프로세스로 결정되는 보고체계에 대해서 솔직하게 대표에게 한마디를 던졌다가, 공개적인 비난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김대리가 자청하여 술 한 잔을 사주면서 위로해 준 적까지 있었다.


물론 오늘 길박사 연구실 앞에서 김대리가 나교수와 같이 어울린 상황을 목격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김대리와 내가 쌓은 신뢰의 성을 허물어뜨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정황적인 증거들뿐이다.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김대리가 나교수가 굉장히 친밀한 관계가 됐다는 거 자체 외에는 드러난 진상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적어도 아직까지는…


길박사는 내 머그잔에 커피 믹스를 두 개나 투입했다며, 그 사실을 애써 강조했다. “홍대리님! 제가 커피 믹스를 두 개나 넣었다니까요. 그거 두 개 넣으면 거의 아인슈페너 급으로 달달해지는 거 아시죠? 아까부터 홍대리님 표정이 어둡길 래, 제가 특별히 홍대리님을 위해서 준비했다니까요. 얼음도 세 개 동동 띄워놨으니 시원하게 드세요”


나는 고맙다는 말도, 그렇다고 싫다는 표정도 아닌 다소 밋밋하고 불투명한 표정으로 입가를 살짝 들어 올렸을 뿐이다. 고개를 추켜세우는 일도, 미소를 보여주기 위해 입술 양쪽에 힘을 가하는 작용도 모두 성가셨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몸의 일부분을, 아니 몸 전체와 정신을 온전히 통제하기 점점 곤란해져간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국면을 전환시키기는 힘들지라도, 할 줄 아는 게 사실 직진뿐이지만 그럼에도 심경에 중대한 변화가 생겨서 급격히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는 사람처럼 나에게는 그런 획기적인 전환점이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도 혼란스러움이 사라지고 평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안도감이 찾아왔다. 어쩌면 설탕이 두 배로 담긴 커피 믹스 때문이었을지도.


길박사와 나는 커피 맛의 순수성에 대해서 잠시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직진할 수 있도록 핸들을 전환했다. 그리곤 한동안 특별한 일이 없을 것이므로 마치 오토 드라이빙 모드로 설정하듯 마음을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고정시켰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다.


“제안서 말씀인데요. 제가 사실 일주일 전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맞게 됐어요. 그게 바로 식사하면서 잠시 말씀드렸던 제안서 건이에요.”


“아, 그렇군요. 제안서, 그렇죠 맞아요 홍대리님이 제안서 쓰기에 대해 말씀하셨죠? 아, 그런데 그건 그렇고 제가 오늘 아침에 유튜브 구독자 천 명 됐다고는 말씀드렸었나요?? 요즘 제가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니까요 하하. 단 몇 시간 전에 한 이야기도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해서 말이에요. 병원에 가서 치매 검사라도 받아봐야 하는 건지, 아직 30대 중반인데, 그런 일은 설마 없겠죠? 아무튼 유튜브 구독자 천 명 만들기 프로젝트 정말 어려웠다니까요. 매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건 어렵지 않은데, 댓글에 하도 시비를 거는 인간들이 많아서…” 길박사가 내 일에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자신의 일엔 분량을 길게 확보해 놓았다.


길박사는 내가 제안서 이야기를 언급하기 무섭게 곧바로 일부러 기획이라도 한 것처럼 확신을 갖고 화제를 유튜브 쪽으로 돌려버렸다. 말하자면 그가 키를 움켜쥐고 있었으니, 그가 가진 악력을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영향력을 통제할 수 없다. 그를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분위기를 교묘하게 제안서 쪽으로 옮겨볼 방안은 있겠으나, 나에게는 그럴만한 재주가 없으니까.


그러던 어느 순간 길박사가 제안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까지의 우스꽝스럽고 유쾌하던 표정을 얼굴에서 말끔하게 덜어내버린 것이다.


“제안서 업무를 맡으셨다 이거죠? 그런데 제안서는 써본 적이 혹시 있으신가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길박사가 물었다.


“처음이죠. 완벽한 처음입니다. 저는 쓰는 것과 관련해서는 거의 CPU와 RAM이 없는 노트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고백하듯이 길박사에게 말했다.


“깡통 노트북이라면 뭐 그래도 가능성 1% 정도는 있겠네요. 그저 부품을 하나씩 채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거기다가 어떤 브랜드, 혹은 어떤 프로그램을 채워야 할지 그게 문제겠군요. 그래요 홍대리님을 슈퍼스타 K 예선에 처음 나온 아마추어 가수라고 가정해두죠. 그렇게 캐릭터를 설정하고 한 번 가봅시다.”


“제가 슈퍼스타 K에 진출한 가수 지망생이라고요? 저는 노래방에서도 마이크를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만…”


“말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네, 저도 농담에 농담으로 화답했을 뿐이랍니다.” 내가 썩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안서를 쓰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템이 중요합니다. 아이템은 선정이 됐나요?”


“아이템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여기 제안 요청서를 보시면…” 나는 노트북 가방에서 주섬주섬 종이 뭉치를 꺼냈다. 물론 노트북 가방 안에는 노트북이 없다. 붕어빵 안에 붕어빵이 없고 국화빵 안에 국화가 없듯이. 내 노트북 가방 안에는 종이 뭉치만 한 가득이다.


한동안 제안 요청서 뭉치를 심각하게 관찰하던 길박사가 침묵을 깨더니 비로소 말이란 것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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