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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안서는 써 보셨어요?” 길박사가 날카롭고 예민한 인상으로 말했다.


물론, 나는 제안서를 써 본 적이 없다. 오늘까지 이 소리는 안이사, 김대리 그리고 길박사에게 이르기까지 총 97.3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지껄인 기분이 든다. 그래,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는 제안서를 쓰지 않았다. 그쪽에 별다른 관심도 없었고 쓸 기회도 갖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지금도 이 상황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흠.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우린 서울역 대합실에 앉아 있고 이제 괌까지 가야 하는 셈이로군요. 그것도 뗏목을 타고…” 마치, 지도를 펼쳐놓고 대양으로 고독한 여행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길박사가 말했다.


“뭐, 이론상은 그런 셈이네요. 그런데 저는 지도도 없고 티켓도 없고 심지어는 생수통도 가지고 있지 않네요. 무엇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유쾌한 표정으로 내가 말했지만 길박사는 지금 우린 농담을 나눌 사이도 아니고 군번상으로 따진다면 내 위치가 그럴 만한 신분이 아니라고 두껍고 진한 눈썹으로 대신 말하는 것 같았다.


“자, 지금부터 아주 간단한 강의를 시작해 볼게요. 저는 두 번은 하지 않으니까, 보이스 레코더로 녹음을 하시던지 카메라로 녹화를 하시던지 그건 알아서 하세요. 요즘 유튜브 촬영하느라 장비도 있으니까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반복은 없고 질문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미안하지만 방금 말씀드린 저의 발언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번 말씀드릴 때, 똑똑하게 주워 담으시기 바랄게요.”


나는 대답 대신에, 사실 그 어떤 대답도 긍정적인 것 외에는 허락받지 못할 것 같아서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그의 다음 발언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어이없었지만 어이없음은 그다음에 챙길 문제였다. 지금 당장은 그의 이론과 실전 강의를 정신을 단단히 붙든 채, 모조리 흡수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제안서 작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글쎄요. 아이템? 발주처?, 예산?, 컨소시엄?, 백 데이터?, 자격? 인력 구성?, 질의응답? 뭐 그런 걸까요?”


“홍대리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사실 모두 중요하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마감입니다. 언제까지 작업을 끝낼 것인가, 하는 문제죠. 홍대리님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죠? 일단 그것부터 챙겨 봅시다.”


“아, 사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오늘 포함해서 4일 남았네요” 뭔가 비밀을 겨우 털어놓는 사람처럼 내가 말했다.


길박사는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아니 그럼 4일 동안 제안서를 쓰겠다는 얘기에요? 아무리 일정이 촉박해도 보통 2주 정도는 시간이 있어야 해요. 공고된 제안 요청서 분석하고 내부에서 브레인스토밍하는데 보통 2일, 아이템 결정하는데 1~2일, 제목 만들고 소제목 따는 데 또 1~2일, 그다음 목차를 따는 게 또 하루, 이 모든 게 결정되면 자료조사하는데 적어도 3일 이상, 디자이너에게 콘셉트 설명하고 스케치와 삽도 그리는데 적어도 2주 이상, 제안서 본격적으로 쓰고 프레젠테이션 자료 작성하는 데 적어도 1주일 이상이 필요해요. 그리고 회계 관련 부서 담당자 불러서 예산 잡는 것도 만만치 않아요. 정부출연금과 기업 분담금도 짜야 하고. 하… 이걸 어떻게 4일 만에 하겠다는 거예요? 삽도를 그릴 디자이너와 예산을 담당한 회계 담당자는 붙여놨어요?” 어디 이런 일이 4일 만에 가당키나 하다는 투로 길박사가 말했다.


“지금 저 혼자뿐이에요. 안이사님이 저에게 던져 주신 과제라서요.” 내가 뭔가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아니, 지금 팀 구성도 하지 않은 채, 제안서를 쓰는 일에 덜컥 뛰어들었다는 겁니까? 잘 모르는 일을 시작할 때는, 일단 질문을 해야죠. 안이사에게 물어봤어요?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제안서를 쓰는 것이냐, 내가 그 분야의 일에 대해서는 완벽한 문외한인데, 누구에게 자문을 구하면 되느냐, 이런저런 질문을 안이사에게 충분히 하셨어야죠. 아니, 일주일이 지나갈 때까지 뭘 하신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만 보내다가 등짝에 번개 한 방 맞고 저를 찾아오신 거네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길박사가 말했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쥐구멍 속에라도 숨는 심정으로 내가 말했다.


“드롭하세요. 안이사에게 못하겠다고 말씀하시고요. 방법 없어요. 제안서계의 스티브 잡스가 와도 이건 안됩니다.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뭘 한답니까?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덤비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제안요청서 한 장 대충 읽어보고 덤비는 인간이에요. 마치 책 한 권 읽고 자신이 모든 걸 안다고 착각하는 인간과 같은 거예요.”


길박사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니 많이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여기서 그의 화를 가라앉힐 방법이 딱히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제안서 작업을 포기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일단 마지막에 포기하더라도 가야 해요. 여기서 드롭할 수는 없습니다. 길박사님이 좀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간곡하게 내가 말했다.


길박사는 대답을 잠시 보류한 채, 팔짱을 끼더니 입술을 굳게 다물고 한동안 침묵으로 응수했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아무런 대꾸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오직 기다림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얼마나 많은 침묵이 태어났다가 사멸됐을까. 침묵을 깨고 그거 내민 최종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그래요. 한 번 해봅시다. 제안 요청서를 훑어보니 과거에 제가 진행했던 사업과 유사한 부분이 있네요. 유사성을 피해 가면서 거기에 다가 독창적인 부분을 끼워 넣어봅시다. 그럼 지금부터 홍대리님이 해야 할 일을 알려드릴게요. 제가 지시하는 부분을 바로바로 진행하셔야 합니다. 일단 바로 사무실로 복귀하세요. 그리고 챙겨야 할 부분들을 모조리 챙겨놓으세요. 일단 마감이 며칠 안 남았으니 제안서부터 제출하고 제안서 쓰는 과정에 대해선 다시 말씀을 드리도록 하죠”


나는 길박사의 말을 듣고 부리나케 짐을 챙겨서 회사로 돌아갔다. 현장에서 퇴근해서 잠시 빵집에라도 들르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이 아쉽다면 아쉬웠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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