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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 배신

단편 소설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회사에 도착하니, 공기 중에 뭔가 암울한 기운이 부옇게 끼어있었다.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일이 석연찮게 흘러간다는 걸 감지할 수있었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나를 기피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다소 느낌이 불편하긴 했지만,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는 중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나 스스로가 분위기를 그렇게 믿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몇 사람은 수근수근거리고 몇몇은 냄새나는 스컹크라도 마주친 마냥 멀찍이 나를 피해서 지나갔다.


“그럴 수도 있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래 예민한 탓이야.” 그렇게 여기기로 판단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자리로 돌아가 노트북을 켜고 이메일부터 확인했다. 혹시 돌아오는 동안 길박사가 요긴한 자료라도 보내줬을지도 모르니 일단 그것부터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이메일 함에는 기다리던 길박사의 메일은 없고, 안이사가 보낸 메일이 [긴급히 확인 요망]이라는 제목으로 마치 경고라도 하듯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메일 전문

홍대리. 안이사입니다.

일주일 전에 지시한 ‘제안서’ 작성 건과 관련하여 새로운 지시사항을 전달합니다.

당초 본 제안서 작성 프로젝트는 홍대리가 주도하여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일주일 하고도 3일이 지날 때까지 아무런 피드백도 없고 어떻게 일이 진행되었는지 보고조차 없는 상황에 처한 바, 이에 본인을 비롯한 프로젝트 이해 당사자들과 충분한 논의와 협의를 거친 끝에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하여 아래와 같은 결과를 도출하게 되었습니다.

1. 홍대리는 지금 시점에서 본 제안서 작성 프로젝트에서 발을 빼도록 합니다.
2. 제안서 작성 프로젝트는 백업이었던 김대리가 주도하여 진행하도록 합니다.
3. 제안서 작성과 관련하여 수집된 자료와 정보를 김대리에게 공유하도록 합니다.
4. 현재까지 진행한 상황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보고 바랍니다.

홍대리는 이메일을 읽은 즉시 위의 사항대로 업무를 이행 바랍니다. 문의사항이 있으면 따로 말씀해 주세요.


한 번 읽고 두 번 반복해서 읽었으나 내용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이해할 것도 없이 단순했다. 분위기를 살펴 보니, 김대리가 주도했든 안이사가 주도했든 누군가 반란을 획책했다는 건 기정사실이다. 길박사 연구실 앞에서 김대리를 만났다는 거 자체가 결국 내가 예상했던 불길한 결말을 결국 암시했다는 증거인 셈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김대리를 찾았다. 하지만 찾아가 보니 김대리는 자리에 없고 책상 위에 노트북도 사라져 있었다. 더 이상했다. 7층에서 12층까지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 안이사방으로 향했다. 노크도 하지 않고 발로 문을 거의 걷어차다시피 하며 열어젖혔지만, 그 소굴엔 안이사도 없었다. 이 회사엔 현재 안이사도 김대리도 그러니까 반란을 기획한 어느 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대리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김대리 책상 앞에 앉아서 김대리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한참, 대략 1분 이상 신호가 갔지만 김대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이번에는 안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이사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치 약속이라도 하듯이 나를 배제시키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소외가 아니다. 완벽한 따돌림이다.


수소문하여 그들의 위치를 파악해 봤다. 김대리와 같은 팀인 강차장에게 물었다. 강차장은 잠시 동안 고민하다,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면 절대 안 돼. 내가 이야기했다고 해도 안 돼. 지난주 월요일에 안이사에게 제안서 작성 업무를 받았지? 홍대리는 본인만 유일하게 그 일을 지시받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일은 홍대리에게만 주어진 건 아니었어. 그러니까 김대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주어졌다는 사실이지.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백업이 된 거야. 나중에 누군가는 지워져야 할, 그런 보이지 않는 백업 말이지.”


“그런데 김대리는 홍대리에게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지. 김대리는 홍대리와 같은 일을 따로따로 하게 된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이게 두 사람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인지한 거지. 만약 홍대리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같이 협력했을까? 경쟁했을까? 김대리는 홍대리를 잠재적 경쟁자라고 여긴 것 같아. 그 일에서 홍대리를 제쳐버리겠다고 작심한 거지. 두 사람 꽤 친한 사이가 아니었나?”


“그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물론 그 이야기는 안이사에게 들었어. 나야 안이사에게 자주 보고하는 처지이기도 하고 안이사와 딱히 나쁜 사이도 아니고 게다가 우린 담배 친구잖아. 담배 피우며 쉬는 시간마다 시시콜콜 회사에서 어떤 재밌는 일이 벌어지는지 듣는 편이기도 하지. 안이사는 입을 벙어리처럼 꽉 봉하고 있으라고 하더라. 안이사는 두 사람에게 똑같은 일을 시키고 누가 더 일을 잘 하는지 결과를 받아보고 싶었나 봐. 말하자면 가능성을 두 가지 방식으로 보고 싶었던 거지. 시간이 아주 촉박했잖아. 2주라는 시간 동안 누구는 해내고 누구는 실패해는 지, 어떤 과정으로 업무에 임하는지 자세를 보고 싶었나 봐. 어쨌든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성공할 테니.”


“김대리는 지시를 받자마자, 일단 제안 요청서부터 꼼꼼하게 읽더라, 나한테 와서는 2주 동안만 진행하던 프로젝트에서 발을 빼도록 도와달라고 했지. 그 부분에 대해선 이미 안이사에게 내용을 언질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오직 제안서 작성에만 집중할 여건이 확보되었던 거야.”


“김대리 참 무서운 녀석이더라고, 아주 용의주도하더군. 주변의 번잡한 것들을 단번에 치워버리더라. 그러니까 책상 위에 널려있던 쓸데없는 녀석들을 한 번에 빗자루로 확 쓸어내는 것처럼 치워버리더라고. 그러더니 화이트보드를 펼쳐놓더니 그곳에 할 일들을 나열하더라. 아니 코딩만 하던 녀석이 언제 저런 치밀한 구석이 있었나 싶었을 정도였지.”


“써야 될 주제와 관련 키워드. 그리고 어디서 자료를 찾을 것인지,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것인지 그 사람의 연락처까지 정리하더라고. 그러더니 바로 전화를 돌리기 시작하더라. 단 몇 차례 통화 끝에 나교수와 연결이 된 거야. 번개 같은 동작이었지. 귀신 같은 실행력이었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버린 거야. 한마디로 9회말 투아웃 투쓰리 상황에서 끝내기 홈런을 날려버린 거지. 나교수가 누구야? 제안서 계의 거물이잖아. 국가 프로젝트의 달인, 그가 주도해서 실패시킨 일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나교수가 아니냐고.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나교수가 자료도 제공하고 인력도 제공한다고 했던 것 같더라. 완벽한 조건이 갖춰진 거지.”


“그러더니 바로 호텔룸을 잡더라. 광화문 근처의 최고급 호텔이었어. 거의 준 스위트룸에 버금가는. 근데 지금이 비수기라 그런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한 것 같더라고. 그것도 인맥을 통해서 싸게 구했다고 하던가. 아무튼, 녀석의 재능인 거지. 그날 프로젝트 TFT를 바로 가동한 거야. 회계팀의 자금 전문가 이과장, 기획 마케팅 전문가 홍보팀의 차대리, 디자이너 강대리, 등등을 모아서 바로 짐을 꾸려서 호텔로 합숙을 꾸민 거야. 드림팀을 만들고 호텔에 전진기지를 만든 거지.”


“예산을 어떻게 확보했냐고? 물론 안이사에게 법인 카드를 받았지. 홍대리는 카드 안 받았어? 요청했으면 줬을 텐데, 홍대리는 카드도 안 챙겼나 보군. 그런건 질문을 해야지. 어떤 지원을 해주냐고. 내돈내산으로 회사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뛰어들기 전에 구체적으로 물어봐야 하는 거야. 질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나와 김대리 모두 안이사에게 똑같은 프로젝트를 지시받았다. 그러니까 나와 김대리는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결과로서 자신의 능력을 검증받는 일종의 시험대에 올랐다는 얘기다. 나는 김대리처럼 일하지 못했다. 김대리처럼 계획적으로 일하는 방식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부분에서 내가 모자랐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질문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혼자서 끙끙 앓다가 시간만 축냈다. 그래서 오늘 이런 충격적인 결과를 받고야 말았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모두 내가 벌인 일들이다. 내가 자초했고 내가 꾸민 일의 성적표를 오늘 받은 셈이다. 물론 나에겐 아직 3일의 시간이 남았다. 시간은 나와 김대리에게 똑같이 남은 것이다.


하지만 김대리는 아마도 제안서 작업을 거의 끝내고 최종 검토에 이르렀을 공산이 크다. 막바지, 그러니까 데드라인에 앞서서 일을 시작하는 나와 같은 아마추어는 아니리라. 나는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늘 이렇게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에 가서 정신을 차려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일을 마치던 습관이 이렇게 나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코딩과 제안서 작업은 너무나 다르다.


그렇게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있다, 김대리에게 연락을 받은 것은 그날 밤 자정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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