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김대리에게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시계 큰 바늘이 막 12 근처를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나는 퇴근해서 대충 씻고 대충 집을 청소하고 대충 폰이나 만지작거리다가 침대에 오르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입속이 영 꺼끌꺼글한 것이 개운하지 않았다. 물 한잔조차 삼킬 수 없는 상황인데, 그 지경에 민달팽이 백 마리를 생으로 삼킨 기분 갔다고 해야 할까.


“홍대리, 지금 통화 가능해? 시간이 너무 늦은 거 아니지?” 늦었다는 시간의 개념적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누구에겐 늦었고 누구에겐 이른 시간이다. 시간의 원리는 원래 그런 속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처한 상황과 입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그런 게 시간의 기본 원리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 시간은 늦었어. 이제 자야 할 시간이니까. 오늘과 내일 사이, 모두가 고요를 꿈꿀 시간이잖아. 김대리가 거기에 균열을 낸 거지. 말하자면 시간에도 쩍 균열을 냈고 나와 김대리 사이에도 균열을 일으킨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된다는 거 잘 알잖아. 어떤 이유로 전화를 걸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어떤 변명이 이어질 거라고 예상은 되지만, 나 피곤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끊었으면 좋겠네”라고 최대한 건조하게, 그 어떠한 감정조차 두 사람 사이에 생긴 틈을 절대 매울 수 없다고 강조하는 사람처럼 내가 말했다.


이렇게 길게 말해놓고도 나는 참 볼품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김대리에게 온 전화 따위는 받았으면 안 됐다. 그냥 무음으로 처리하거나, 받더라도 '나는 너한테 용건이 없어',라고 강력하게 의사를 표시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주저리주저리 의미 없는 말들을 오히려 내가 변명하는 사람처럼 지껄이고 말았다.


“홍대리,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 일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 나는 기회가 왔을 때 잡는 게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홍대리처럼 묵묵하게 일하는 사람도 회사에는 필요하다고 봐. 하지만 나처럼 떠들썩하게 일을 벌이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물론 홍대리는 내가 정치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까짓 제안서 프로젝트 망해버리라고 속으로 저주를 퍼붓고 있을지도 몰라. 물론 그건 홍대리의 자유고, 선택이니까, 거기까지 내가 뭐라고 말할 입장은 아냐.”


“다만 우리에겐 우리만의 선이 있다는 거야. 홍대리는 그 선이 흐릿하고 미약한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쉽게 말한다면 그냥 치실 같은 개념인 거야. 단단한 거 같지만 잡아당기면 툭 쉽게 끊어지고 마는. 어떤 얘기인지 알지? 내 비유가 다소 지나치다는 건 잘 알아. 비유가 그렇다는 거야. 나는 질긴 타입이고 일을 어떻게 몰아가야 하는지, 말하자면 이 싸움은 토끼 사냥과 비슷하다는 거야. 홍대리, 토끼 사냥해봤어?"


"나는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또 꽹과리와 북을 치는 거지. 아주 높은 언덕에서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는 가장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막 사냥을 시작하는 거야. 무리가 있더라도 내가 지금 사냥에 집중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나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 모두에게 알리고 토끼에게도 경고하는 거지. 어디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봐라. 그리고 막다른 쪽으로 몰아가는 거야. 그리고 낚아채는 거지. 단숨에 말이야. 이건 인내력의 싸움도, 자신과의 싸움도 아냐. 그저 요란하게 분위기를 달구고 한꺼번에 획 낚아채버리는 기회의 싸움인 거야.”


“그게 내 방식이야. 그 방식대로 지금까지 살아왔고 그 방식에서 문제점을 발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난 언제나 성공할 일만 주도했고 내 방식대로 그걸 이끌어왔어. 그게 내가 이 직장이라는 세계에서 생존해온 방식이야. 그건 홍대리를 일부러 소외시키려는 것과는 상관이 없었어. 그건 의도하지 않은 시스템의 결과지. 말하자면 시스템의 알 수 없는 예외 같은 거야. 잘 알잖아. 예외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예외상황은 사태가 터졌을 때, 그걸 복구하는 코드를 넣으면 되는 거잖아. 난 거기에 충실했을 따름이라고”


“그러니까 김대리는 내가 시스템의 예외라는 거네. 나는 예외처리로서 척결해야 할 대상이라는 얘기고?” 내가 다소 흥분한 상태에서 말했다.


“홍대리, 흥분하지 말고 들어. 말이 그렇다는 거야. 쉽게 설명하려니 그런 비유를 든 거고. 곡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네. 어쨌든 나는 성공만을 생각해. 될 일을 되게 하는 거지. 안 될 일을 뒤엎어보겠다고 이유 없이 뛰어드는 사람은 아냐. 어느 정도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이 들면 뛰어드는 거지. 썩은 패를 들고 7번째 카드를 기다릴 순 없는 거잖아. 홍대리 세븐 포커해봤지?”


“김대리, 늦은 밤에 전화해서 지금 나더라 포커 따위를 얘기하려는 게 전부야? 핵심을 말해줘. 나는 핵심을 언제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래, 내가 홍대리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은 우리 팀으로 들어오면 어떻겠냐는 거야. 드림팀이 꾸며졌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전문분야가 따로 있잖아. 홍대리는 네트워크 전문가니까, 그쪽 기술을 풀어주면 어떻겠냐는 거지”


“지금 그러니까 김대리 얘기는 이런 거네? 김대리는 지금 양팔을 서로 움켜쥐고 어깨는 커다랗게 핀 상태에서 턱은 뒤로 최대한 거만하게 집어넣은 채로 말하고 있어. 그리고 다리는 적당하게 벌린 채 서 있지. 마치 한 사람 정도가 밑으로 딱 지나갈 정도로 말이야. 지금 나더러 무릎을 꿇고 그 밑을 비굴하게 통과해서 김대리가 던져주는 콩고물 같은 거나 받아먹으라는 거네?”


“홍대리가 그런 비유를 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틀린 건 아니야. 어쩌면 정확하게 맞혔다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지금 홍대리에게 제안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보면 돼. 지금 홍대리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아. 그 제안을 거부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나도 장담할 수 없어. 안이사가 어떤 사람인 줄 잘 알잖아. 한 번 실패한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 거야. 안이사는 실패를 절대 허용하지 않아. 그의 지론은 실패한 인간은 도태되어야 한다는 거야. 싹수가 노란 싹은 바로 제거를 해버리는 거야. 그게 안이사가 회사를 일궈낸 방식이었고 사업을 성공시킨 그만의 철학이었어.”


“아마 안이사가 다음 계획을 준비 중일 거야. 그게 홍대리에게 내려지는 가장 최악의 경우의 수가 될 확률이 높을 테지만, 그래서 나는 홍대리를 구제해 주기 위해 말하자면 갱생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 거야. 그러니 자존심 이런 거 다 내려놓고 내 밑으로 기어 들어오라고. 그리고 박박 기어 다니라고. 일단 살아야 후일을 도모할 거 아니냐고, 전장에서 멋지게 전사하는 게 뭐가 중요해. 죽으면 다 끝나는 거잖아. 난 시시한 상대와 싸우긴 싫거든. 일단 몸이라도 좀 단련시키라고. 하하”


“알았어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하고 나는 바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바보 같았다. 생각해보고 알려준다니...


나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오늘을 포함하여 프로젝트의 데드라인은 3일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3일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데 심각성이 존재했다. 세상은 나를 제외하고 자기들끼리 쑥덕쑥덕거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어져도 모두가 잘 살 터였다.


한심했다. 김대리에게 화 한 번 내보지 못하고 그저 전화기를 들고 말싸움 따위나 해대는 나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단순한 피해의식이 아니다. 이번 제안서 프로젝트를 통해서 내가 완벽한 실패를 맛봤다는 사실이다.


이런 쓸데없는 망상에 빠져있다,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오래 묵혀두던 피곤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내리 3일 동안 잠만 잤다. 중간중간 몇 번 깨긴 했지만 잠은 무덤 속의 악령처럼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아챘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잠에서 영영 복구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다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데드라인 당일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제8화 : 배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