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에피소드 2
밤과 낮 혹은 방향을 바꿔서 낮과 밤, 성격은 다르지만 일란성쌍생아 같아 보이는 그 무엇에 나는 순식간에 매료됐다. 추석이 영원히 종료되지 않을 끔찍한 이벤트처럼 내 방에서도, 내 방 1킬로미터 바깥에서도 이벤트는 곧 종료되겠지만, 어떤 이벤트는 내가 죽음에 이르러도 결코 끝나지 않기도 한다. 영원히 미 종결된 사건으로 남는 것이다.
잠깐 나올 수 있어?라는 메시지가 밤인지 낮인지 구분하기 힘든, 그러니까 의식을 되찾아오기에는 다소 역부족인 상태에서 다정한 공기를 일순간에 찢어버렸다. 그 메시지는 핸드폰에서도 노트북에서도 동시에 불똥을 튀겼다. 뭔가 팔딱팔딱 살아있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죽은 상태도 아닌 그 무엇이 유황불 도가니 속에서 점프를 해댔다. 내 방 책상 위에서 그리고 서재 작은 테이블 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번쩍거렸는데 그것은 번갯불이라고 보기에도, 부싯돌의 작은 충돌이라고 보기에도 다소 식상했고 의식을 환기시키기에도 다소 역부족이었다.
나갈 수 없지, 당연한 거 아냐. 오늘은 추석이고 아니 내일도 추석일 테고, 이벤트는 종결되지 않고 미완성인 상태로 계속 남아있을 텐데, 내가 바깥으로 나간다는 당면 과제에 불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 그러니까 몸을 그쪽으로 내던진다는 건 지극히 합당한 일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고견 말이다. 나는 누군지 분간할 수 없는 메시지를 발송한 상대가 누구인지 물색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귀찮았고 나의 안락함을 방해하는 메시지 너머에게 벌써부터 싫증이 난 나머지, 그 텍스트를 입속에서 껌 씹듯이 질겅질겅, 짓이기고 부숴버리고 믹서기에 갈아버리고 싶은 참혹한 심경이었지만, 그런 짓을 해도 상대방에게 아무런 위해조차 가할 수 없다는 설정에 실망하고 말았다.
나는 따분하지만 책을 읽어야만 한단 말이다. 지금 J.D. 샐린저는 아까부터 나와 접촉을 시도 중이다. 나는 그의 시니컬한 독백에 귀를 기울이려고 이렇게 발작적으로 노력하는 중인데, 누군가는 이렇게 벌건 태양이 지천에 깔린 모든 거처로 잠깐 나와볼 수 있냐고? 대체 어디에서 어떤 율법으로 그런 접촉을 시도하는 건지 분간도 할 수 없는 마당에 자리를 잡고 서서 나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거냐고.
나갈 수 없어! 나갈 수 없다고! 난 여기에 내 방에 얌전하게 앉아서 지금 책을 읽어야 한다고. J.D. 샐린저의 소설을 읽고 있는데, 대체 네 따위가 누군데, 나의 달콤한 오후에 야심에 가득 찬 그물을 던져놓고 내가 그 그물망 사이에 낀 채로 허우적대길 기대하는 거냐고. 나는 고등어도 아니고 질긴 넙치 따위도 될 수 없으니까. 기대일랑 모두 접어버리고 네 고향으로 돌아가버려. 네 본거지로 돌아가서 친하디 친한 너의 골목 벗들과 오랜 담소나 나누라고, 그런 얼간이 같은 질문이나 네들끼리 실컷 던져 대라고. 그런 일은 오늘 여기서 일어날 수 없는 거라고.
메시지를 보낸 대상이 누구인지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아이폰 상단, 펼침 메뉴로 단지 그 텍스트가 넌지시 오후의 한가로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리를 세워가며 자신의 의견을 설파하려고 나름 열띤 토론을 펼치는 중이었지만, 그런 건 겉으로 보이는 낡은 행사, 초라한 행색에 불과했으므로 심대한 의미를 갖추진 못했다.
하지만 그 존재는 비교적 차분하지만 한편으론 지나칠 정도로 집요했다. 어쩌면 녀석의 의도가 아닌 시스템의 확고할 거라고 착각한 믿음에 대한 배신일지도 모른다. 10초 간격으로 혹은 30초 간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원한 순간 사이에 잠들어 있는 무의 간헐적인 깨어남이었다고 치기로 하자. 어쨌든 죽은 짐승은 가끔 무덤에서도 자리를 보전하고 일으킨다. 죽어있다고 가정해 봤자, 사실은 죽은 게 아닌 잠시 잠들어있던 것이다. 너는 속았다.
잠깐 나와 봐, 할 말이 있어. 할 말은 얼마나 할 말이 많고 그 말에는 얼마나 헤아리기 힘든 이야깃거리들이 담겨 있을까, 이야기가 담긴 할 말에는 죽지 않고 살기를 희망하는 콘텍스트가 두 눈을 부릅뜨고 죽기를 고대하고 있을까. 오르페우스가 포기했던 생과 사의 갈림길, 어쩌면 나도 그 어둠의 강 건너편에서 또 한 번의 실수를 기대하며 똑같은 반복에 대해 반박 의견을 내밀길 기대라도 하는 걸까.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기다렸다. 어쩌면 문이 열리자마자 그 깊고 포악한 짐승의 입속으로 처박히는 그러니까, 엘리베이터는 거대한 짐승의 시발점이며 그 시발점은 무엇이라도 소화시킬 수 있는 식도와 대장의 분기점이라는 사실을 상상하며 나는 1층 버튼을 두려웠지만 아무튼 눌렀고 번쩍 빨간 숫자가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대체 왜 내 작은방이 아닌 엘리베이터에서 마치 목구멍에 걸려서 소화되지 못한 채, 그곳에서 치적 치적 어딘가에 꽂힌 채, 헤매는 불필요한 가시로서 작용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너는 기다리지 못하고 1층, 그러니까 짐승의 소화를 담당하는 하층부 밑바닥에서 고이 어떤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너는 친애하는 나의 과거에게 말을 걸어서 한 가지 추락의 가능성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잠자코 기다릴 뿐이기만 했다. 반가움 따위는 너에게 선물하고 싶지 않아. 우린 대면 대면한 사이잖아. 그러니 올라가서 아니 내려가도 상관없어. 커피는 허락할 수 없고 위로는 가끔 가능해. 다만 잠시 소파에 앉아서 우리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갈지 잠시 노닥거려볼 순 있을 거야. 다만 거기에 나는 없어. 나는 영원한 침식과 그 반작용에 반하여 지금 무시 중이거든. 계속 의식을 버리고 체념하는 중이라, 너에게 진솔한 한 마디는 내밀 수 없을 거야.
너는 어느새 내 충고에도 불구하고 내 집 안으로 무단 진입했지, 소파에 앉아서 잠시 물끄러미 내 얼굴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봤어. 온기도 없고 물기도 사라진 말하자면 완전히 메말라버린 우물처럼 헤아릴 수 없는 깊이만을 가늠하며 내 눈을 들여다봤지. 내 코앞까지 가만히 다가와서 눈 뒤쪽의 세계의 문을 열려고 시도했지. 하지만 아무리 열어도 열리지 않는, 굳게 닫힌 문을 열쇠도 없이, 다가와 묻기만 했어. 열쇠 가지고 있어? 연결고리를 찾는 건 너무 힘들어. 이건 보물 찾기가 아니잖아. 그런 기묘한 암호 메시지 같은 걸 한 아름 안고서 번역을 시도하다가 내 얼굴에 위로란 걸 퍼부어댔지. 양동이 안에서 쏟아지는 아이스버킷 챌린지처럼 나는 차갑고 끔찍하게 깨진 얼음 조각들을 감당해야 했고.
잘 지내는구나. 잘 지내는 걸로 보여. 나 없어도 잘 지내, 역시 그렇구나, 너는 너 혼자서도 이렇게 밥 잘 먹고 커피도 마시고 책도 마시면서 그럭저럭 무탈하게 네 반경 안에서 무탈하게 지내는구나. 그래 알았어. 나는 그만 내 구역을 애완동물처럼 키우는 것으로 만족할게. 이 구역은 네 차지니까. 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 네 인생에서 나는 무법자에 불과했으니까, 그제 내가 떠났던 것처럼 나는 내 자리를 찾아야지. 너의 추석은 너의 추석으로 내일의 운명은 내일에게 맡기고, 그게 내가 할 일이라면…
내일 2시 비행기야. 뉴욕으로 향하는 마지막 선택지지, 그곳으로 가겠다고 늘 선언했었잖아. 그러니 난 뉴욕으로 가는 거야.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네 방에 그렇게 가득 들어찬 책 중에서 네 친절함은 어디에 있을까. 네 방 책장, 방에 가득 쌓아 올린 저 성곽들 중에서 내 이름이 인쇄된 기억들은 단 한자리도 있었을까. 그런데 그런 허물어진 건 묻고 싶지 않아. 대답하지 마. 그런데 말이야, 공항에서 2시간 정도 여유가 생길 거 같은데 말이야. 너를 옭아맸고 너를 지켜줬던 너의 몰락을 모른척했던, 저 녀석들 중에서 내가 한 가지를 전리품으로 불쑥 차지해간다면 너는 어떻게 되지? 너는 무너지는 건가. 기어이 회복되는 걸까? 그래, 내가 너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내가 그럴만한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면, 나는 그래도 되는 여자잖아? 그러니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선택하겠어. 유재원 교수와 이윤기 교수의 책 중에서 무엇이 더 유리할까나, 네 가슴 정중앙에 비수를 꽂아버릴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뭘까. 나는 어제부터 이 순간을 벼렸어. 갈고 또 갈고 갈다가 결국 그 녹물을 꿀꺽 삼켜버렸잖아. 아주 달더군, 모두 네 잘못이야. 네가 나를 여기에 초대한 게 첫 번째 잘못이고 네 시간을 앗아가서 네 희망봉을 무너뜨리도록 유도한 게 네 두 번째 잘못이야. 모든 잘못은 네가 초래한 거고, 그러니 그에 따르는 대가도 네가 보상해야 하는 거야. 미안하게도 나는 뉴욕으로 떠나겠지만, 출국하기 전에 그리스인 조르바는 읽어볼게, 네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그 인물 중에서 내가 너의 나는 되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조르바와 대면하면서 네 얼굴을 떠올리게 잠시나마 노력해 볼게. 그리고 3시에 찾아와. 출국장 12번 게이트 앞 쓰레기통에서 그 책을 찾아가. 잠깐만, 그만둬, 나는 지금 너의 선택을 들으려 온 게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