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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게 도와줘

연작 소설 에피소드 3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그녀가, 한때나마 사랑했던 그녀가, 아니 어쩌면 지금도 실오라기 같은 희망에 붙들려 있어야 할 나의 그녀가 떠났다. 그녀는 연기처럼 나타났다, 거품처럼 부서져 내리는 동화의 여주인공처럼 내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무단으로 점유하더니 그것을 품에 안고서 스르르 여기를 이탈해버렸다.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뉴욕으로 떠나는 걸까. 어쩌면 오늘은 그녀의 마지막 외로운 무대가 펼쳐진 건 아니었을까. 그녀는 획기적인 사건을 기획하기라도 한 걸까.


그녀의 편지를 찾아야 했다. 창고에 들어가 몇 개의 낯익은 박스를 들춰내곤 그 안에서 그녀와 주고받았던 오래된 엽서 뭉치와 먼지뿐인 부유물들과 그 사이에서 길을 잃다가, 편지지 더미를 찾았더랬다. 거기엔 그녀가, 그녀의 우편번호가, 소격동 어딘가에 위치한 그녀의 온전한 7색 글자들이 망실되지 않고 꿋꿋하게 인쇄되어 있을 터였다. 아니 왜, 오래된 편지지에서 빛바랜 그녀를 뒤적거리는 거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그건 의식적인 기만이 아니야? 찾는 게 아니라 더 잊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게 아니냐고. 차라리 바깥으로 나가 불태워버려, 깨끗한 단념을 보내버리라고. 자신 없아? 그러면 나가서 그녀를 붙잡으라고, 뉴욕으로 완전히 떠나기 전에, 그녀의 원피스를 아니 팔소매를 잡아. 택시를 멈춰 세워. 앞으로 달려가라고.


그런 음성들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강렬하게 외면했을지도. 누군가 들어라, 제발 그 의미를 해석해 내라고 강요한들, 그런 건 그저 집요하기만 한 낱말들로 무작위적으로 배치되어 있을 뿐,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고 말게 될 그런 글자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 두자. 남자답지 않게, 구차하게, 볼썽사나운 짓은 그만하자. 그냥 얼간이처럼 자리에 주저앉아서, 목청껏 소리 지를 생각도 울어버릴 생각도 하지 마, 안으로 구겨 넣어, 말아버려 그리고 꾹꾹 눌러 담아내거든 삼켜, 겨우내 깊이 감춰둔 셋방살이의 기나긴 설움처럼 악에 받혀도 그냥 모른척해, 그게 살아가는 비결이야. 잊는다는 건 어려운 말이지, 그래 어려워.


나는 그녀에게 허락한다. 조르바를, 조르바의 영원한 자유를, 구속의 해방을, 떠남을, 나로부터의 모든 제한에서 벗어나게끔… 그래서 그녀는 자유와 이상을, 희망의 포부를 미래에 담아내고, 무질서에서 질서를 회복하고, 그 속에 새로운 분자로 규합되고, 희석되고 섞이고 잊고 감당하고 거기서 감동하고 또 모든 불순물들을 걸러내고, 그래 그 더럽고 희생양으로 지탄받을 마땅한 과거들, 구원받지 못할 그런 패배자의 낙인이 찍힌 과거들은 그녀의 살갗에서 살살 떼어낸다. 잿빛의 비늘, 꺼끌꺼끌하고 거칠거칠한 그런 몹쓸 표피의 부산물들을…


내가 지금 지독하게 무서운 것은 다만 이 어둠이 만든 배신의 기억들 때문이 아니다. 나는 자꾸만 어느 순간으로 환원된다. 빚을 갚으라는 망령의 전언에 휘말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만한 재량이 없다. 그러니 나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나의 원본을 본다. 본다는 것, 그러니까 하늘을 보든, 창밖으로 시선을 여행 보내는 일이든 한가하게 어둠 속에서 글자들을 후비적거리며 그 안에서 뭔가를 발굴해내려고 요란하게 투쟁하는 일이든, 그런 건 모두 멜로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쇠락한 것들이다. 나에겐 모든 게 과분하다. 차라리 비통하자고 고백하곤 외면하자. 요란하게 체념하자. 재앙에 굴복하자. 나는 그렇게 무신론자 중에서도 가장 가증스러운 수도사가 된다.


나에겐 갈림길, 간청과 애원의 길이 어둡게 열려 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간다. 내 것이었던, 내 소유가 분명했던 것, 그것을 되찾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나는 단 한 가지도 소유해 본 경험이 없다. 내 문제는 바로 경험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나는 갑자기 도둑맞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먼저 나에겐 획득의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되찾는 게 아닌 원 소유주가 되어야 하는 사실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가두선전을 하듯이 길거리로 진출하여 그 누구에게라도 구걸을 한다. 내 사랑, 내 과거, 내 허물, 내 원한과 원망, 체념과 절망, 악에 받힌 그것들을 나에게 돌려다오. 내 애원을 들어줘. 나에게 돌아와서 내 것으로 변신해 줘. 그렇게 만든 후, 나를 빼앗아가줘, 나를 도둑질해줘. 모든 걸 용서해 줄게, 모든 과오는 과오로 남겨두고, 그 위에 무덤을 예쁘게 쌓아줄게. 모래로 만든 성을 튼튼하게 쌓아줄게, 그러니 여기로 와서 그 위에 드러누워. 내가 도륙질을 당할 수 있게, 피동적인 인간이 되도록 꼭 도와줘. 나를 숨겨줘. 너의 무덤 속으로. 숨은 쉬지 않을 게.




연작 소설 에피소드 1

연작 소설 에피소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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