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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없는 추석의 사유

연작 소설 에피소드 1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2022년의 추석은 다소 특이했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추석은 10일 넘게 집에만 있었다. 오직 집에만 기거했다는 게 이번 추석의 특이성이자 괴이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집안에 우두커니 머물며 집 바깥으로 나서봤자 고작 집으로부터 반경 1킬로미터 이내에서 마트나 도서관 혹은 서점으로 돌아다닌 게 전부였으니까, 내가 원한 성과를 거의 거둔 거라고 봐도 되겠다. 그것들이 모두 1킬로미터 이내에 있었다는 게 나에게 축복이 되는 걸까. 재밌는 것은 내가 원한 목표가 어느 지점에 있었고 내가 그곳으로 정확하게 내달렸는지 그것까지 현시점에 이르러 정확하게 재단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이다. 길고 긴 10일은 어쨌든 지났고 지난 시점에서 분절된 과거들을 회고하는 중이지만, 때론 기억하려고 무언가를 헤집는다는 게 사람을 지나치게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 되니까, 게다가 지금 내가 그 행위를 밟고 있다는 게 나를 더 힘들고 지치게 만드니까.


연휴가 시작되기 전 토요일 오전, 도서관을 찾았다. 어떤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기보다는 도서관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공간적 기대감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흡수되기를 바랐다. 과연 바람대로 나는 도서관에서 낯선 방문자가 아닌, 도서관의 한 일원, 그곳의 책장이 된 거라고 말하자면 그곳을 내 집처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누군가의 따뜻하지 못한 조언처럼 책장과 책장 사이의 구조적인 것들을 누벼가며, 의도하지 않은 선택이 어떤 필연적인 결과를 거두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한껏 증폭되어 몇 시간이고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해도 낭비의 느낌보다는 무언가 내 마음속에 비축되는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더 강력하게 지배했달까. 아무튼 그런 도취감은 순전히 추석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매어있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작은 해방감에서 촉발됐다. 그래, 나는 추석이면 늘 찾아오는 어떤 압박감과 통제감을 내 힘으로 벗어버렸다. 그건 분명 추석이 시작되기 전에 내 가슴속에서 스스로 우러나온 어떤 폭발적인 기제였다. 그것은 십수 년 넘게 내 안에 응축된 하나의 사소한 원자로였지만, 그 원자로는 언젠가 제풀에 지쳐 폭발할게 뻔했다. 나는 그런 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안다. 제풀에 지칠 때까지 수수방관 내버려 두는 게 얼마나 위험한 파국을 초래하는지 나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것은 해방 전선을 구축하고 나에게 새로운 처신을 유도한다. 처신이란 나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그것은 평소의 패턴에서 의도적으로 멀어지는 결정이다.


도서관에서 다섯 권의 책을 빌렸다. 그것은 최대한의 선택, 의도적이거나 혹은 우연한 이끌림, 말하자면 나의 선택을 한 번 믿어보자는 의식에서 시작된 것. 그 밖의 내 작은방, 어쩌면 감옥이라고 칭해도 무방한 그 작은 공간 한쪽 벽엔 책장이 거미줄처럼 포진되어 있었는데, 이미 꽉 차버린 1열 앞, 모든 2열엔 새로운 책들이 비상식량처럼 비축되어 있었고 나는 그 책들을 나날이 소화시킬 운명에 처해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란 순결하다. 순결한 것들은 그 자체로서 빛을 내지만, 순결한 그것을 바라보는 식자의 태도에 달려있는 것이 순결한 자의 운명일 터였다. 어쩌면 나는 시간이 규정한 형틀에서 목을 빼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다, 내 목엔 형틀이 보이진 않았지만, 투명 인간처럼 언제나 내 목 주변을 장식한 채, 옥죄며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부인한다.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될 테니,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억지로 그것을 분리해낼 수 없을 테니, 단순하게 부정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원초적인 굴레 탓에 내 모든 회의는 깨어난다.


작은 발악, 작은 벗어남, 내 정신은 새벽 5시까지 환하게 깨어 있었다. 깊은 밤마저 완전히 자신의 존재에 까맣게 잠식된 순간에도 나는 온전히 깨어나서 어떤 악한 망령이 어깨를 감싸며 유혹의 언어로 집어삼키려는 순간에도 잠들지 않았다. 나는 내 방 작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서 의식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앞쪽의 책에게 광선을 쏘아붙였다. 물론, 그 광선이란 건 나약하기 그지없어서 종이를 뚫을 수도 없고 종이 뒤쪽까지 닿아볼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 의식은 책의 질감을 촉각으로 느끼고 냄새가 콧속에 공동을 만들고 그곳에서 나비처럼 춤을 춰대고 창밖의 어둠이 코를 골아가며 간혹 검은 까마귀가 날갯짓을 하며 존재를 휘두르는 색채의 스펙트럼 앞에서도 자세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몇 시간을 넘게 한자리에 고정된 채로, 의식과 무의식의 향연 속으로, 의미 없는 잠재의식의 활보 속으로 헤엄치듯 다만 엄중한 자세를 놓지 않고 그제의 의식, 그러니까 모순적인 직장에서의 삶은 내 집이 아닌 1킬로미터 평방 바깥쪽에 여전히 놓아둔 채, 걷지도 않고 날아다녔다. 자유롭게, 존재감 없이, 부피와 양감도 없이 모든 것이 부재되었지만, 한껏 채워진 듯한 격정적인 기운에 휩쓸린 채.


폭격과 폭격 사이에 찾아오는 유례없는 고요함과 잔잔함, 격정과 폭압 사이에도 태풍과 같은 안전한 눈은 존재할 테니까, 나는 그 실격된 판정과 거리에 나름 안전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그 놀라운 집중력과 치밀한 계획 덕분에 나는 한 뼘이라도 개량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까. 성장했다면 나는 높이가 아닌 그 깊이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여전히 글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고 시작하기란 이번 추석이야말로 한없이 나에게 집중하며 세상이 나에게 표적으로 세웠던 모든 평범함으로부터 멀어지는 일만큼 힘든 일인데, 나는 어떻게 지금 이 순간, 글을 쓰며 얼마나 내려갔을지도 모를 그 깊이의 세계를 손으로 더듬어대고 있는 거란 말인가.


내 방엔 지금도 어둠이 가득하다. 한낮에도 나는 블라인드를 내려놓고 마치 새벽 다섯 시인 것처럼 그 공간을 어제 그 모양 그대로 그러니까 축조된 금형처럼 내버려 두고 있다. 나는 지금도 갇혀있지만 흔들리고 있다. 당장, 이 글을 쓰는 행위를 그만두고 저 방 한가운데의 부속물로 자리를 잡고, 그것이야말로 나를 흔들어대는 세상의 냉정하지 못한 시선으로부터 격리되는 일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은 또 새로운 내일이, 아니 새로운 내일이라고 가정한 내일이 경망스럽게 시작될 거라고, 새로운 각오로 무장해야 한다는 엄정한 사실에 직면하겠지만, 어떡해서든 나는 그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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