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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지 못해 산다고

단편 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는 1만 년 넘게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지독히 불행한 인생이어서 태어나자마자 그 여린 불꽃이 이내 사라졌지만, 지나가던 신의 은총을 받아 우연하게도 끝이 없는 생명을 얻었다. 삶이란 막다른 골목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길이다.


J는 밀레니엄이 시작된 2천 년에 태어나서 현재 1만 2천하고도 22년이 되었으니 어떤 인간들보다 실컷 살아봤다고 자부할 수 있겠다. 하지만 J에게는 생에 대한 자긍심 따위도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우월감도 없었다. 분명 죽어야 했는데 왜 살고 있는지 J는 자신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난 저주를 받은 거야. 내 비극은 무려 1만 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고!” J가 그의 홀로 집 뒤뜰에 나와 외쳤다. 날아가는 검은 까마귀가 그 소리를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채 무심히 전나무 우듬지에 내려앉았다.


“휴… 대체 왜 죽지를 않는 거야?” J는 영원한 소멸을 처절하게 원했다. 삶에서 영원히 격리되고 싶었다. 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물론 J가 처음부터 죽음을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게, 자신이 60억 명의 지구인 중에서 유일한 선택을 받은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운 순간도 더러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사랑에 빠진 단 한순간일 뿐이었다. 사랑은 그의 무한한 삶과 상관없이 유한했다. 그렇다, 그가 느끼고 체험하는 모든 순간이 J에겐 유한했다. 무한대와 같은 바흐의 선율이 J의 삶에서 연주되지만 J의 시간은 항상 짧게 변주되다 그치고 말았으니까. 그래서 그의 삶은 비극이 됐다. 나의 죽음이 아닌 타자의 죽음을 수천 번, 아니 수십만 번 목격하는 것 자체로 그의 삶은 온통 비극적인 장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서 죽는 것을 수없이 목격하고 그 과정에서 가슴 가운데가 찢어지는 고통을 수천 번 겪고, 또 그럼에도 절대적인 고독을 참을 수 없어서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J의 이기적이며 얄궂은 운명 탓에 J는 영생이 그저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J는 죽으려고 죽음에 대한 갈망이 너무나 강렬해서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간단한 방법부터 시작해서 J의 죽음은 점점 고도화된 그 무엇, 죽음을 극대화하는 어떤 단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J는 죽음에 노련해졌다. 죽음에 관대해졌고 죽음을 연구하는 관조의 자세로 접어들었다. 무엇보다 죽음에 신중했던 것이다. J는 죽음을 설계했고 치밀한 과정으로 죽음을 죽음에 연결된 모든 가치와 동일시했다. 그리하여 수면제나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실로 단순한 방법들에서 벗어나 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기차선로에 뛰어들어 보기도 하고 샌프란시스코까지 굳이 날아가 금문교 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했으며 탐험자 행색을 하고 아마존 숲을 찾아가 악어의 늪에 속절없이 머리를 처박기도 했고 심지어는 레지던트로 분하여 수술용 메스로 손목을 그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죽지 못했다. 죽음은 그를 그의 세상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용한 죽음의 길이라는 수단을 부렸으나 죽음에 가까워지기는커녕, 팽창하는 우주처럼 죽음은 J와 머나먼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J가 죽음을 선택하려는 그 순간마다 나타나는 맑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오로라 현상이었다. J가 스틱스 강에 기꺼이 몸을 바칠 때마다 J의 육체를 중심으로 노란 빛깔의 얇고 투명한 분신처럼 생긴 보호막이 형성되어서 J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모든 공작들을 무위로 끝내버린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면 오히려 100년의 삶이 더 연장되는 느낌이랄까. 그것은 J의 수호신이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J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당신에게 내 영혼을 제물로 바치겠나이다.”라고. 그러나 J의 간곡한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 J는 지구 어디에나 구경할 수 있는 동네의 흔한 찬밥에 불과했으니까.


J는 312번째의 아내에게 자신의 질긴 목숨에 대해 털어놓았다. 1만년의 긴 시간을 단 30분 만의 분량으로 말하자면 고도로 압축하는 일이었다. J의 312번째 아내는 물론 그 오래된 역사를 믿지 않았다. 다만 남편의 젊음을 늘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으나, 그것은 남편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이 아니라 저주였다니, 남편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내는 잘 몰랐다. 그래서 아내는 자신이 남편이 그동안 사랑했던 모든 존재들 중에서 일부분이라는 소외감에 빠져서 또한 혼자서 자신이 외롭게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J를 떠나고 말았다. 편지 한 장 없이…


그래서 J는 혼자 남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J가 죽을 때마다 친구처럼 나타나는 그 오로라 기운을 향해 이글거리는 분노와 원한의 감정을 토해놓았지만, 그것은 잠자코 옆에서 J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옆에 서 있었으나 죽기 전에는 존재감이 없던 J의 수호신이 1만년 만에 그러니까 참다못해 J에게 말을 걸었다.


“나를 추앙하는가?” 수호신이 양초에서 피어나는 푸른 불꽃처럼 짧은 문장을 공중에 늘어놓았다.


“무슨 소리야? 넌 누구야? 네가 그 수호신이라는 작자야? 너 말할 줄 아는 거지? 그럴 줄 알면서 지금까지 나를 무시했던 거야? 대체 왜 나여야 했던 건데. 내가 왜 신의 저주를 감당해야 하는 건데. 나는 왜 일반적인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거냐고. 왜 나만 궁극의 고통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거냐고?” J가 울부짖었다.


“날 추앙하냐고. 네가 원하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어. 선택은 너에게 있는 게 아니라 너에게 제시된 것일 뿐이야. 너는 정해진 길, 그 길을 밟고 거쳐갈 뿐이라고. 그러니까 대답해. 나를 추앙하냐고!” 수호신이 인간계가 아닌 소리, 저주파 음과 비슷하게 생긴 포말이 공기와 함께 파도를 쳤다.


“난 너의 수호신이야. 다른 평범한 인간들에게도 수호신은 존재하지. 다만 그들의 수호신은 유통기한이 비교적 짧아. 말하자면 백 년도 못 가는 허섭스레기 같은 존재들이지. 난 그들과는 차원이 달라. 나는 지구에 속하는 거의 모든 하찮은 생명들에게도 추앙을 받는 존재거든. 그러니까 나를 추앙하냐고? 아니 추앙할 자세가 되어 있냐고. 나는 떠받드는 존재라고.” 수호신이라는 오로라가 말했다.


“난 널 추앙하지 않아. 추앙은커녕 난 널 저주한다고. 제발 나에게서 떠나줘. 난 죽음을 원한다고!” J가 두 팔을 들고 애원하며 으르렁거렸다.


“난 네가 여태껏 죽으려고 허튼짓을 할 때마다 그걸 막아왔지. 그게 너희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더 절대적인 존재가 나에게 짊어준 영원한 과업이었으니까. 난 충실하게 내 역할에 맞게 처신해왔던 것뿐이야. 인간에게는 권리가 없어. 간단해 보이는 죽음조차 선택할 수 없다고. 죽음이 너희에게 신호를 보내면 너희는 그것에 고개를 숙이면 그만인 거야. 너희에겐 의지란 게 1도 없어. 수호신의 개입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게 죽음이라는 체계라고. 비합리적인 것 같지? 너희들 모자라는 녀석들에겐 그렇게 짐작되겠지. 너희들의 어리석은 이해의 범주로는 말이야.” 수호신이 말했다.


“나도 이제 지겨워. 하찮은 인간 따위의 투정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고. 원한다면 내가 그 방법을 알려주지. 그래, 내가 오늘 그 비법을 전수해 주도록 할 테니 잘 들으라고. 해결책은 비교적 간단해.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 왼편, 즉 심장에 단도를 깊이 꽂아 넣으면 돼. 보름달이 뜨는 밤에 예리하게 벼린 단도를 준비하면 되는 거야. 그 단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잠든 사이에 몰래 다가가 심장에 쑥 밀어 넣으면 되는 거야. 아주 간단하지? 그렇게 할 수 있겠어? 네 심장을 찌르는 것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될 텐데, 결행할 자신이 있는 거야? 자, 난 너의 경건한 기도에 응답해 줬다고. 신을 대신해서 말이야. 더 이상 해줄 말은 없어. 더 이상 날 호출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럼 이만…” 수호신, 아니 부연 연기 같은 존재는 미래를 제시하고 사라졌다. 말끔하게… 어떤 필연적인 숙제만을 남겨놓은 채… 1만년의 삶은 곧 종결될 수 있을까.


J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이 살자고, 아니 내가 죽자고 어찌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방법을 거부한다면 결국 J는 영원히 죽지 못한 채, 죽은 사람처럼 무덤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다. 312번째 아내인 O는 이미 그를 떠난 지 오래였다. 자신을 위해서 누군가의 심장에 칼을 쑤셔 넣는다? 게다가 그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고?


J는 자신을 추앙하냐고 묻는 그 수호신을 저주하며 앞으로 그 누구도 결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죽을 수 없다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인 선택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J는 이집트 가자 지구로 찾아가서 남몰래 J가 닦아 놓은 피라미드의 비밀통로를 찾아낸 다음, 미라가 들어간 석관 속에서 녀석을 꺼내서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신 눕기로 했다. 그 속에 누워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다고, 어쩌면 죽음보다 더 달콤한 잠의 세계로 빠져들자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그 끝에 찾아오는 고통을 이 비좁은 석관 안에서 이해해자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J는 무한의 세계, 1만 년보다 더 깊고 아득한 무의 세계를 꿈꾸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J의 수호신은 옆에 누워서 J를 비웃으며 손을 궁중에 대고 커다란 원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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