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진정한 블랙

단편 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7,600자의 소설입니다.


나는 원래 검은색 따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 좋아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딱히 이유는 없다. 원래 그렇잖은가. 싫어하는 건 수백 가지의 이유로 싫은 거고, 좋아하는 건 단 한 가지의 이유만으로 충분히 좋은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검은색을 싫어하는 이유를 당신이 굳이 물어본다면 나는 자신 있게 그 이유들을 노트에 나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싫어하는 이유를 일일이 열거하고 싶진 않다. 굳이 싫은 것까지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죄를 지은 인물도 아니고 나는 변명 따위는 더 혐오하는 족속인지라, 아무튼 그렇다고 해두자.


그런데 단 한 가지의 이유가 어느 날, 짠 하고 생긴 것이다. 검은색을 좋아하게 된 단 한 가지 원인이 하늘에서 툭 떨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 한 점 없는데 소나기가 퍼부어 대듯이…


그런데 그게 기묘하게도 어떤 관점으로 본다면 검은색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검은색을 좋아하게 되었다면서 또 검은색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쓰니, 저 녀석 소설을 쓴다고 요즘 깝죽대더니 드디어 정신세계 어딘가가 망가지고 말았군!이라고 진단을 내릴지도. 그런 추측과 생각에 대해서 나 역시 변명을 대고 싶진 않다. 지금까지 내가 하려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내 의견이 약간은 궤변에 속할지도 모른다고, 네 녀석은 소피스트의 피를 물려받았구나,라고 진단해도 딱히 할 말은 없다. 여기까지 나의 짧은 장광설을 마치고, 나는 기자가 후속 정정 보도를 하는 것처럼 다음 에피소드를 성실하게 이어가 보련다. 다만 재미는 보장하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내 글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동판매기 따위에서 10초 만에 출력되는 그런 근본 없는 글일 테니까.


몇 달 전, 나는 코엑스 부근에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다녀온 적이 있다. 흔한 커플이 그렇듯이 우리도 주말마다 데이트 비슷한 이벤트를 벌이곤 했는데, 그것은 이른 아침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카페에 가서 음료 메뉴를 놓고 설전을 펼치거나, 혹은 쓸데없는 연예계 가십거리를 가지고 격론을 펼치다가 그것도 지루해지면 근처 공원을 찾아서 산책을 불모로 잡아 온갖 의미 없는 잡설과 공상에 빠져 있다가 지루함을 느끼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연애 10년 차의 커플의 무료한 하루 사용기 되겠다. 각설하고 평범한 커플의 밋밋한 하루 스토리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본론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다.


그날은 코엑스 근처, M 영화관, 꽤 이른 시간이었다. 그날따라 레퍼런스 관인지 특별 관인지 한국에 론칭한 지 얼마 안 되는, 게다가 평범한 직장인이 부담하기에는 가격이 꽤 나가는 돌비 시네마관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는데 - 금액이 좀 나가는 돌비 시네마관을 놓고 누가 결제를 하느니 마느니 우리 커플을 연애 10년 차 커플답게 각자의 가벼운 지갑 사정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치는 중이었는데, - 나는 특히 이번 달 가계부에 꼼꼼히 기록된 나의 막대한 지출 내역을 놓고 극심한 분노에 빠진 나머지, 절대로 이번에는 내 카드로 결제하는 일은 없을 거라며,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정도로 고성으로 여자 친구와 설전을 펼치는 중이었다. 다소 치사하고 쪼잔한 나의 태도를 놓고 여자 친구도 절대 질 수 없겠다는 각오로 일전에 뛰어들었으나, 나의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에든 치밀하고 완벽한 논리에든 결국 그 장벽 앞에서 무너져 패배의 쓰라린 맛을 맛보곤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의 카드를 나에게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내미는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여자 친구의 소중한 카드를 데스크에 내밀고 다른 상영관과는 절대 차별을 둔다는 그 문제의 돌비 시네마관으로 무사히 진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검은색과의 대면이 시작된 것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것은 검은색과는 달랐다. 마치 최고의 인도네시아산 루왁 커피와 싸구려 믹스 커피와의 차이라고나 할까. 나의 비유의 한계에 대하여 독자들은 너른 이해를 해주길 바란다. 이것은 비유와 차원이 다른 영역의 문제라, 어쩌면 경험해 보지 않고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저 너머에 속하는 곳이라 글로서 그것을 풀어낼 자신이 영 없다. 아무튼 나는 그 돌비 시네마관인지 특별 상영관이라는 곳에서 검은색의 기운에 취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내 넋을 통째로 뺏긴 기분, 내 영혼이 몰락하는 기분이 들었으나, 그것은 문학작품에서 말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본 경험과는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물론 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 정도의 황홀함을 전달해 줄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순간의 감격이 어쩌면 인간이 느끼는 희열 중에서 최고의 경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애써 강조하는 것이지, 어쩌면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범주 내의 경험이라, 당신도 그 경험을 체험해 보시라 추천하는 말밖에 방법이 없다. 이해해 달라.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영화 트레일러가 한참 진행 중에 어느 장면에서 나는 낯선 검은색을 구경하고 말았다. 극장 안에는 온통 검은색의 융단이 화려하게 장식되고 있었다. 커튼도 검은색, 좌석도 검은색 심지어는 바닥도 앞자리에 앉은 덩치 큰 녀석의 뒤통수도 검은색이었다. 그래 이곳엔 빛이라곤 절대 얼씬할 수 없는 마치 남자라면 절대 근접할 수 없는 금남의 기숙사와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두운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여자 친구와 어떤 중대한 일을 도모할 때는 보통 검은색이 지배하는 어둠을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평상시에는 빛이 드나들지 않는 세상은 기피하는 편이다. 그런데, 극장 안엔 온통 어두움, 암흑, 그러니까 검은색으로 치장된 것뿐이었으니, 그 안에서는 나와 여자 친구가 간혹 속삭이는 말에도 검은색이 칠해져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트레일러에서는 검은색이 아닌 다른 말로 검은색을 표현했다. 세상에! 맙소사! 우리가 볼 수 있는 검은색보다 더 진하고 리얼한 검은색 그것은 바로 완벽한 블랙이었다. 그래,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게 바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블랙이다. 블랙 때문에 나는 장황하게 여자 친구를 끌어들이고 특별 상영관을 들먹거리고 새삼스럽게 극장 안이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 더해진 블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검은색 혹은 블랙, 두 단어가 취하는 세계는 다소 모호하다. 두 가지가 섞여도 그다지 누가 더 강한 세력인지 분간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인공적으로 표현하려는 블랙의 농담과 고조, 그 어떤 현실의 블랙보다도 완벽한 블랙이라고 강조하는 블랙의 세계를 직접 체험하고 나니, 나는 그 블랙이라는 것에 대하여 단순하게 동경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종교의 위치로 격상해버린 것이다.


블랙, 블랙은 어둡고 깜깜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을 빨아들이고 흡수하는 세계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색의 개념을 가지는 것보다는 무의 개념, 완벽한 진공, 모든 세계의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을 떠올리게 한다. 블랙은 어머니처럼 이 우주에서 생명을 탄생시킨 원초적인 세계, 신이 지배하는 영역에 속한다. 인간도 인간 이외의 생명도 나아가 우주의 모든 물질도 암흑인 블랙의 세계로부터 생겨났다. 따라서 블랙의 자비를 입지 않은 세계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블랙이야말로 파괴적인 죽음이나 소멸을 뜻하는 개념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원천을 뜻하니, 그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젖가슴과 무엇이 다를 수 있으랴. 그런데 이 세상엔 그 블랙을 표현하려는 자가 흔하다. 그들이 떠드는 블랙이라는 것은 대개 가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블랙은 블랙의 언저리나, 블랙의 꽁무니 따위 같은 것이다. 못생긴 돼지 꼬리 끝에 달랑거리는, 인간에 의해 고의로 잘려나간 꼬리 뭉텅이 같은 것이다. 그런 가짜 블랙을 보면서 인간은 환호를 외치고 자신이 진정한 무의 공간을 체험했다며 기쁨에 겨워한다. 나는 그런 꼬락서니를 보면 비웃음을 금할 수 없어서 괴롭다. 대체 너는 진정한 블랙을 구경이나 해보고 지금 블랙을 안다고 말하는 지껄이냐. 나는 블랙의 완벽한 파노라마들 구경하면서 지금까지 내 인생을 거쳐왔을 수없이 많은 가짜들을 생각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쓰레기 더미에 올려져서 불가마에서 태워져야 한다. 나는 진짜와 가짜를 필터링해내는 능력을 가진 부류다. 난 진짜다.


너무나 감격스러운 나머지, 눈물을 뚝뚝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멜로드라마에서 연인의 재회나 이별 앞에서도 절대 낭비하지 않은 그런 진정한 감동을 예상하지 못한 장소와 시간에서 느끼고 만 것이다. 놀란 나머지, 나는 여자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저거 봤어? 블랙이야! 완벽한 블랙이라고. 우리가 진공 속에서나 느낄 수 있는 완벽한 블랙을 지금 구경한 거라고. 숨 막히지 않아. 저 블랙을 볼 때마다 내 눈에서 반사된 빛이 모조리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 내 존재가 사라지고 잊히는 거야. 저 자그맣고 까만 점 하나에 빨려 드는 거라고,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이 허무하게 점 하나에 굴복하고 마는 거라고. 블랙이란 모든 존재를 쓰러뜨리는 세계야. 너와 내가 존재하는 모든 세상의 체념, 절망, 상실, 허무, 그리고 겸손을 나타낸다고!”


여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이렇게 말했다.


“닥치고 영화나 봐. 쓸데없는 블랙 뭐 어쩌라고!”


나는 그 한 마디에 그만 더 이상 이 여자는 내 대화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 나처럼 블랙이라는 세계에 감화하고 작은 점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보지 못하고, 강력한 생명의 태동을 느끼지 못하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진동과 함께 춤을 추지 못하는, 그런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만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망설임이 없다. 느끼면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여자 친구에게, 완벽한 블랙의 기쁨을 공유할 수 없는 미천한 자와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선언을 하곤, 10년이 넘는 연인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다음, 더 이상 이 세계에서 내가 느낄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영화관에서 나왔다.


영화관에서 나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향하는데,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온통 블랙의 향연이었다. 좌석도 앞 좌석의 남자의 뒤통수도 스크린에 투사되는 픽셀과 여백 중에서도 유독 블랙이 내 눈길을 끌었다. 나는 완전하게 블랙에게 포섭된 것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블랙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블랙에 속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블랙처럼 살아가는 일이란 무엇일까, 잠시 고민에 빠졌으나 블랙과 같은 감정의 세계는 이론적으로나 지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차원에 해당됐다. 그것은 직관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영역에 속했다. 나는 감정이 시키는 대로 본능적으로 행동하기로 했다. 블랙이란 그런 것이다. 냉정하고 단호하고 단 번에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버리는 마치 칭기즈칸의 인정사정없는 인종 청소처럼 나는 블랙의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고 포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도 나는 블랙만 생각했고 블랙만 찾아 헤맸다. 어디에든 블랙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곳으로 향하면 그뿐이었다. 블랙은 자석처럼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어쩌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중력의 법칙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당겼다. 나는 블랙의 정령이 되고 블랙의 사신이 되고 블랙의 부하가 되어 블랙이 의미하는 바대로 행동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집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을 블랙과 블랙이 아닌 것으로 구분했다. 논리는 간단하다. 블랙은 취하고 블랙이 아닌 것은 버린다. 블랙을 판단하는 기준은 내가 특별 상영권에서 체험한 기억에 기초한다. 따라서 나는 모든 블랙에 속하지 못하는 것들, 다소 블랙이 될 수 없는, 블랙의 체계로 이해될 수 없는 부류들을 정리하여 내다 버렸고 조금이라도 블랙과 유사한 것들은 남겨두었다. 블랙과 사촌지간인 것들은 완벽한 블랙을 구현한다는 색채의 마법을(페인트) 통하여 해결하기로 했다. 너무 아끼는 물건이라면 그것들의 표면에도 블랙을 입히기로 했다. 그렇게 집안의 모든 물건을 블랙으로 바꾸거나 그렇게 하기 힘들다면 색깔을 바꾸면 된다.


티브이도 가구도 노트북도 스마트폰도 모두 블랙이 되었다. 책장에 꽂힌 책에는 블랙을 표지에 입혔다. 모니터는 바탕을 블랙으로 바꾸고 최대한 블랙에 가까운 글자로 색상을 설정했다. 눈이 다소 아프긴 했지만 통증은 문제가 아니었다. 블랙 커튼으로 외부의 빛도 차단시켰다.


며칠이 지나서 집안은 거의 블랙에 유사한 형태로 변화했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가 구현하려고 한 진정한 블랙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는 믿음을 활용하면 된다. 미천한 블랙은 얼마든지 개선할 가능성이 있다. 조금 더 진정한 블랙을 갖춘 것들로 차차 교체하면 된다. 급할 건 없다. 인생은 블랙처럼 길고 블랙은 세상에 한가득이니까. 지금도 블랙은 꾸준하게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니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블랙을 내 집안에서 주체적인 세력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빛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빛이 없이는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음식을 먹기 위해서 조리하는 가스레인지도 문제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미약하게 확산되는 불빛도 문제였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블랙의 반대편에 서 있는 못된 화이트 녀석들이었다. 그렇다고 놈들을 집안에서 축출할 수도 없었다. 원한다고 해도 때론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게 세상이 아닌가. 나에겐 빛과의 작은 타협이 필요했다. 그때 고안해낸 것이 블랙 선글라스였다. 나의 선택은 탁월했다. 실제 그 물건이 블랙이 아니라면 내 눈을 블랙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닌가. 물질의 본질은 바뀌지 않아도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속여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왜곡이 아니다. 시스템의 절차적인 과정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점프시키는 행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것은 조작도 거짓도 아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행위란 말이다.


나는 그렇게 해서 냉장고 안의 불빛과 가스레인지의 파란 불꽃 그리고 나머지 빛이 드나드는 거의 모든 세계를 블랙 선글라스 하나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보다 편안하게 블랙의 세계에 동참하면서 블랙이 취하는 세상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피부였다. 애석하게도 나는 흑인종이 아니었다. 내가 흑인종이었다면 이런 고민거리는 생기지 않았을 텐데… 내 피부에 페인트칠을 할 수도 없고 유전자 조작을 할 수도 없는 노릇. 대체 나는 내 주변만 열심히 긁어대고 다니기만 한 것이다. 바로 나라는 인간은 블랙과 하나도 닮아있지 않으면서 나는 나 외의 블랙만 수집하고 있던 게 아니란 말인가. 그래, 마지막 단계는 나를 블랙으로 만드는 일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해질까. 블랙과 내가 하나가 되는 방법, 완벽한 블랙, 진정한 블랙이 된다면, 아아 나는 내 생명까지 내놓을 작정이다. 방법을 찾아보자, 블랙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결정을 내릴까. 그 순간 나는 티브이에서 어떤 장면을 구경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거룩한 장례식이었다. 누군가의 육체가 검은 관에 누워서 화장터 안의 불가마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이었다. 그래, 나를 구워버리자, 나를 태워버리자, 나를 불살라서 내 몸을 검은 재로, 아니 블랙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리자. 나를 블랙에게로 헌화하는 것이다. 역사의 위대한 인물처럼 나는 내 몸을 분신하여 묵직한 재로 만들고 그것을 내가 창조한 모든 블랙과 하나가 되도록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시작을 의미한다. 내 존재는 그렇게 화이트를 버리고 블랙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다음 날 나는 내 소원대로 화장터의 불가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블랙의 부품, 완벽한 블랙의 위대한 구성원이 되었다.

완벽한 블랙은 최종적으로 구현되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가 죽지 못해 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