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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

단편 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사람들은 모두 변해. 그러니 내 사랑도 노래 가사처럼 똑같이 변해가는 거야. 그게 사랑의 원리야. 사랑은 한자리에 머무르기를 싫어해,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어쨌든 물 자국이 번져나가듯 어디론가 움직여. 한자리에 고정되지 않는다고.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 마. 애석하게 생각하지도 마. 자 이 노래처럼 눈을 감고 멜로디를, 아니 가사를 입속에서 굴리고 흥얼거려봐. 착상된 의미를 떠올려 보라고, 그러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질 거야, 아니 가사에게 동화될지도 몰라. 안 그래? 잘 들어봐” J가 흐르는 물을 끊어내듯이 말하며 이어폰 한쪽을 그녀의 귀에 슬며시 꽂았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모두 변해가는 모습에 나도 따라 변하겠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사랑이란 게 유통기한이 있어서 만료된 날짜처럼 결국 변질되고 마는 거야? 사랑이 구름이야, 솜사탕이야? 아니면 가볍디가벼운 빨랫줄에 걸린 하얀 드레스처럼 그냥 바람이 불면 훅 하늘로 높이높이 날아가 버리는 그런 존재야? 그럼 한때나마 내 것이었던 그 드레스는 어디로 가고 누가 새로운 임자가 되는 건데? 이제 내 사랑은 이 우주 한가운데 박제되겠지? 영원히 발굴되지 못한 채 말이야.”


그녀는 말했고 저항했고 하소연했다. 그녀의 가슴속 어딘가를 비워낼 때까지 집요하게 토해냈다. 자존심도 없이 끝끝내 모든 시간을 원점으로 돌려놓겠다고, 마지막 기차에 억지로 올라타듯이 원망이 가득 찬 목소리를 J에게 한가득 늘어놓았다. 다만 그렇게 한다고 J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다. J는 예의 없이 단호했고 결의에 차 있었다. 중대한 결정이든 사소한 판단이든, 그 무엇이든.


J는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얼어붙은 것은 지나치게 차가운 것으로 돌변했다. 돌연,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창백한 영혼들이 어깨를 차갑게 뒤덮고 가슴으로 내려와서 그리고 허벅지까지 침투했다. 그것은 모든 희망을 배신했고 깨뜨렸고 불행을 수평선 너머로 불안을 역류시키며 멀리 먼 곳으로 확산시켰다. J의 다정한 옛 표정이며 넓은 가슴이며 오랫동안 그녀에게 품었던 한결같던 마음을 모두 거둬버리고 J 자신을 창살 없는 감옥에, 햇살마저 드나들 수 없는 정신병원에 완전히 격리시켜 버리고야 말겠다고 스스로 예고한 것이다. 그녀는 차라리 그것이 연극이길 바랐다. 그녀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비극을 객석에서 바라보는 거라고 가정하기로 했다. 객석엔 가련한 여주가 비참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어지럽게 흐트러뜨리고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가냘픈 두 손으로 자신의 몸뚱이를 겨우 지탱한 채, 강물에 떠내려가는 불쌍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없어. 사라졌어. 그때의 나, 오직 너만을 상상하고 너만을 느끼고 너라는 통증에 겨워했던 나는 상실된 거라고, 난 자줏빛이 아니야, 빛바랜 장미꽃 같은 존재라고, 가시가 없는 줄기 같은 존재라고, 바닥에 쓸려 다니는 쓸모없는 가을 낙엽 같은 거라고, 치워지고 태워지고 마는 그런 존재야. 그러니 팔꿈치를 괴고 내 얼굴을 바라보는 기억 따위는 이제 잊어버려. 모두 지난날의 나, 삭막한 계절에 머물던 나였다고. 나는 바람처럼 바위 위에 걸 터 앉아 세상을 높은 곳에서 바라볼 거라고. 나는 커다란 존재가 될 거야.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거야. 그 출발은 너를 잊고 너를 단념하고 이 정든 고향을 잊는 행위로부터 출발하는 거야. 그러니 미련도, 원망도, 그리워하지도 마. 난 넓은 곳을 향해서, 저 황무지처럼 삭막한 곳을 벗어나서 이제 애드벌룬을 타고 둥둥 날아갈 거라고. 그게 나란 말이야”


그렇다고 J가 그녀를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히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정의하기가 다소 곤란했다. 마음은 한 장소에서 격리되고 또다시 새로운 거처를 찾아 옮겨 다닌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변해갈 수밖에 없듯이, 썩어가듯이, 메말라가듯이, 화석이 되어가듯이, 그리고 고체가 되어가듯이, 노래 가사처럼 한 사람에게만 어울리는 사람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래, 사랑이란 징검다리처럼, 한 곳을 밟고 있다가 한쪽으로 훌쩍 뛰어넘는 거다. 사랑은 J에게 그런 개념이었다. 일생에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한 여자가 원하는 대로,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버리고 온전하게 한 여자에게만 영혼을 쏟는 일 역시 변해가야 마땅했다.


“미안해. 아니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래, 그건 역행이 아니야. 선택은 때로 우리를 무참하게 막다른 곳으로 몰아붙인다고. 난 난 골목 끝이 너무 싫어, 어떤 선택지도 없어서 그 앞에 주저앉아 해 질 녘을 고이 받아들이기만 하는, 그런 자세는 원하지 않아. 그래서 나는 옮겨가는 거야. 나비처럼, 꿀벌처럼 새로운 꿀을 찾아서 새로운 합리적 도피처를 찾아서 자리를 바꾸는 거라고. 초등학교 시절 짝꿍을 바꾸는 것처럼. 그저 그런 갈아치우는 개념이야. 더하기도 빼기도 없어. 그저 평형 상태만 유지하는 거야. 그러니 앞에서 언급한 미안해,는 실수라고 말할게. 그 말에 의미를 붙이려고 상징적 의미가 포함됐을 거라고 해석하려고 시도도 하지 마. 그냥 우린 지치고 우린 서로를 가끔 잊었고, 그 간헐적이라는 의미가 우리에게 이별이라는 의미로 변절된 것뿐이니까.”


“인정할게 난 변절자야. 나치의 아이히만 같은 인간이라고. 사랑도 시키는 대로 했나 봐. 수없이 많은 여자를 그래서 정신적 죽음으로 몰아갔지. 아이히만처럼 죄의식 없이 말이야. 의식 없이 무관심으로 너를 사랑하게 될까 봐 난 두려워. 그러니 나는 언제든 이런 선택을 반복할 거야.”


J의 말을 듣고 그녀는 더 이상 J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비틀거리며 걸었다. 시선을 잃고 말을 잃고 걸음걸이까지 어리석게도 그녀는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렸다. 먹는 습관을 잊어버리고 물건을 주문하는 일을 단념하고, 버스 타는 방법을 상실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어깨에 기대는 일을 망각하고, 누군가를 응원하는 일을 포기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절차를 체념하고, 숨 쉬는 방법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의 눈과 코, 그리고 입이 어디에 붙어있었는지 놓아버리고,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사랑해서 그 사람의 품에 안겨 속삭이는 말들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해 계속 돌아가기만 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저버리게 되기까지. 그녀가 알고 있던 복잡한 일부터 단순한 일까지, 그녀가 그동안 경험했던 모든 순간들이 필름이 끊기듯 하나씩 하나씩 기억에서 제거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가 살기 위한 고육지책일지도 몰랐다. 그런 기억을 모두 안고 태연하게 살아간다는 것, 죄를 지은 자가 불지옥을 맨발로 다니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그녀가 살기 위해서라면 또한 J 없이 살아가려면 결국 그녀는 감각과 상관없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고통을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렸다. 송곳으로 피부를 부러 찔러도 혀를 뽑아내려고 꼬챙이로 잡아당겨도 커터 칼로 피부를 쓸어도 고통 따위는 사치에 불과했다.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멀리 떠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고통과 행복을 영영 끊어버렸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녀에게 구원이 된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무릎을 꿇고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결심을 했다.


“저는 냉정하게 살아가렵니다. 매몰차게 J를 대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세상 사람 모두에게 완벽한 죄인이 되어서 그들에게 영원히 불친절한 사람으로 살겠어요. 그것이 죽지 못하는 자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기묘한 운명을 거느리고 사는 자의 마지막 선택일 테니까요.”


J는 그녀에게 손짓을 하고 마지막 남은 눈물방울을 꽉 짜냈다. 그리고 젖은 마음을 공중에 몇 번 털어내고 말렸다. 그리고 그녀의 고통은 타인이 앓는 흔한 열병이라 생각하며 그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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