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개발자의 독립 일대기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길박사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길박사는 물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제안서 프로젝트에서 내가 진즉 제외됐는지, 김대리가 TFT를 꾸려서 나교수와 은밀한 공작을 진행 중인지, 내가 그 끝에 결국 퇴사라는 마침표를 찍게 됐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순진한 길박사는 제안서 더미를 뒤진 끝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드디어 찾아냈다며 자료를 당장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데드라인은 훌쩍 지나가버렸다. 엄청난 뒷북치기다. 게다가 나는 이미 퇴사까지 감행해버렸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퇴사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덩달아 마음도 거기를 완벽하게 떠나버렸다. ‘제안서 따위는 앞으로 절대 쓰지 않을 거야’, 라고 작심까지 해버렸다. 그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결국 완곡하게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상황을 길박사에게 솔직하게 전달했다. 100% 수준에 수렴할 정도로 상당히 쪽팔렸지만… 보도국의 지침에 따라 성실하게 글을 쓰는 기자처럼 그렇게 나는 왜곡은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을 길박사에게 전달했다. 사건을 요약하기 위해 과거사를 돌이키다 보니 가슴 한가운데가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길박사에게 당분간은 일을 떠나 쉴 작정이라고 말했다.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어요?’ 라고 길박사가 물었지만, 그런 거 없이 그냥 무작정 쉬고 싶다고 말했다.
길박사와 전화를 끊고 김대리에게 배신당한 기억이 한가득 몰려오는 바람에 침대에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불을 끄고 방 한가운데를 지독한 어둠에 휩싸이게 만들어도, 눈을 감고 더 새까만 어둠에 뛰어들어도 억지로 잠재워버린 의식들이 공기 중에 떠다니며 나를 괴롭혔다. 결국 잠을 포기하고 포우의 무서운 단편을 읽다가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올 때쯤에야 겨우 잠에 빠졌고 꿈을 꿨다.
꿈을 묘사하자면 대충 이랬다.
길고 적막하고 축축한 잠. 터널처럼 완벽히 검은 공간에서 나는 헤매고 있다. 더듬더듬 길을 찾아가던 나는 작은 점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무작정 걷는다. 걷고 그러다가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그래서 기어가다 점 끝에 겨우 다다른다. 점과 가까워질수록 점은 더 세력을 확장하지만 정작 나는 왜소해진다. 말하자면 점은 자신의 몸집을 내 위치에 따라서 자유롭게 줄였다 늘였다 한다. 그러다 나는 그 점 끝을 통과해서 어느 지점에 당도한다.
이해할 수 없지만, 꿈속의 세계에서 나는 내 방에서 크레타섬과 비슷하게 생긴 곳으로 이동했다. 물론 나는 크레타섬에 가본 적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그곳이 크레타섬일 거라고 추정했을 뿐이다. 근거는 없다. 내 마음 어디선가 비롯된 그릇된 믿음이 그것을 사실이라고 가설을 세울 뿐.
오직 하얀 벽과 파란 지붕이 전부인 그곳에서 나는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내린다. 간혹 벽을 붙들고 가파른 언덕길을 조심조심 내려가야 하기도 한다. 그러다 먼 곳, 파란색 박공 위에 서 있는 낯선 사내를 한 명 목격했다. 그 사내는 오크로 만든 야구 방방이를 양손에 들고 포식자처럼 나를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비좁은 골목 사이를 지나다니며 그 사내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나도 모르게 눈길이 그쪽으로 돌아가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사내는 야구 방망이를 양손에 들고 당장 위협이라도 가할 것처럼 결의에 차 있다.
그러다, 사내는 오크 야구 방망이를 들고 바구니에서 야구공을 집어 든다. 하지만 그 야구공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태양처럼 말 제몸을 불태우는 중이다. 사내는 그 공을 한 손에 들었으나 손에서 감각을 느끼지 않는다. 사내는 공을 공중에 슬쩍 던지고 떨어지기 무섭게 배트로 프리배팅하듯이 스윙을 한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완벽한 정타다. 작은 태양이 배트에 맞기 무섭게 내 심장 쪽으로 날아온다. 매섭게 나를 겨냥한 것이다.
터널에 마주친 작은 점처럼 그 새빨간 공은 작은 마침표에서 시작해서 커다란 태양으로 돌변해간다. 남자는 계속 작은 태양을 손에 쥐고 공중으로 던진 후 거칠게 스윙을 한다. 계속 정타가 나오고 그럴 때마다 점 하나는 태양이 변신한다. 나는 피할 수 없다. 지금은 가까스로 내 옆을 스쳐갔지만 언젠가 저 태양이 내 몸 정면으로 날아와 결국 내 의식 한가운데를 관통하리라.
대체로 꿈은 그런 형태였다. 며칠 째, 같은 꿈을 매일 꾸는 소설가처럼 나도 똑같은 꿈을 계속 꾸고 있다. 꿈속에서 나는 터널을 통과해서 어느새 산토리니 섬에 가 있고, 그곳에서 낯선 사내에게 원인 모를 공격을 받는다. 사내가 왜 나를 지목하고 공략하려는지는 알 수 없다. 사내는 그런 역할을 하기로 이미 예견되었을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아슬아슬하게 사내의 공격을 피하지만, 언젠가 결국 제압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 암울한 미래는 굳이 예측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꿈은 어떤 미래를 암시하려는 걸까? 정해진 운명대로 내가 적확하게 이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걸까? 사내는 누굴까. 사내는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걸까. 나는 어디로 가는 중일까?
침대를 정리하고 책상에 앉았다. 노트북 덮개를 열고 이메일 함을 열었다. 길박사에게 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홍대리님 소식 잘 들었어요. 일이 그렇게까지 안 되는 쪽으로 흘러갈지는 몰랐네요.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자료를 보내드릴 걸 그랬나 봐요. 제가 빨리 도와드렸으면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제 마음이 더 무겁습니다.
그래서 제안을 한 가지 드려보고 싶은데요. 지금 홍대리님에겐 휴식하면서 재충전할 시간도 필요하지만, 미래를 준비할 시간도 동시에 필요한 것 같아요. 사람이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장소에 머물면서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거든요. 그 방법이 바로 지금 제안해 드리려는 내용의 핵심입니다.
강원도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제가 아는 분이 펜션을 운영 중이십니다. 그곳에서 잠시 휴가라도 가져보는 게 어떨지 홍대리님께 추천하고 싶네요. 부담은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홍대리님께 진 부채를 갚는다 생각해 주세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갖게 됐으면 좋겠어요. 혹시 관심 있으시면 꼭 연락 주세요
길박사.
그가 나에게 어떤 부채를 졌는지 잘 모르겠다. 그는 마지막까지 나를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나의 불성실함이 이런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길박사의 제안은 고맙지만, 현재로서 나는 여행을 떠날 기분도 휴양지에서 마음을 놓을 기분도 아니다. 게다가 인수인계할 내용을 정리해야 한다. 모든 게 정리되면 그때는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장 그르니에의 <섬>의 도입부를 읽다 그만 잠이 든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까지 읽다, 어느 장면에서 길을 잃어버렸는지 명확한 기억은 없었다. 오직 도입부에서 헤매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 아침이 찾아왔고 거실 한가운데까지 햇살이 길게 기지개를 피우고 나서야 아침이 한 참 전에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 거드름을 피우는데, 어딘가에서 ‘그만 일어나서 행동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강조하자면 나는 10평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산다. 밤에 외롭다고 우렁 각시를 남몰래 데리고 사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심심하다고 숨바꼭질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절대 환청은 아니었다. 장담하건대, 나는 분명 그 소리를 내부가 아닌 내 방 어딘가에서 들은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소리에 바로 반응했다. 그리고 명령에 불응하지 않고 곧바로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정예 요원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키고 이빨을 구석구석 닦고 샤워까지 단숨에 해치워버렸다. 거의 고양이 세수 지경이었지만… 그리곤 미리 내려둔 커피를 원샷으로 들이켜고 이 집이 아니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상관없는 태도로 외출이란 걸 감행해버렸다. 마치, 조선의 왕이 밤에 잠행이라도 펼치듯이, 다만 대낮인 것이 흠이긴 했지만…
나가자마자, 퍼뜩 떠오른 생각은 김대리를 만나야겠다는 결정이었다. 왜 김대리를 만나야 하는지, 만나서 어떤 대담을 펼쳐야 하는지 결정된 것은 없었다. 지극히 즉흥적인 판단에 불과했다. 멱살을 뒤흔들던지, 얼굴에 주먹 모양을 크게 박아주던지, 그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행전지가 결정되자, 지금 이 시간에 어디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합숙하던 플라자 호텔로 찾아갈까 싶기도 했지만, 제안서 제출이 이미 끝났으니 합숙은 이미 종료됐을 확률이 높았다. 대면평가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런 일은 합숙하지 않아도 제각각 예상 질문을 꼽아놓고 침대에 누워 포테이토 칩이나 하나씩 입에 넣으면서 대응해도 그만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당장 김대리 뒤에서 초크를 걸고 싶어도 일단 만나야 그런 복수도 가능하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나는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 먼저 김대리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판단이 들어, 그룹웨어에 접속한 다음, 그의 소재지를 확인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김대리가 플라자호텔에서 합숙을 마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한편으로 불행인 것은 그 호텔에 아무나 드나들 수 없다는 점이었고 스위트룸은 워낙 경호가 삼엄해서 개미 한 마리조차 드나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소 막막하긴 했지만, 일단 호텔 입구에서 그가 나오기를 무작정 기다렸다. 나는 김대리가 BMW 컨버터블로 차를 얼마 전에 바꿨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것이 현시점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정보였다. 나는 얄팍한 정보를 안고 주차장 출구에 앉아, 눅진한 햄버거 따위나 씹어대며 피의자를 탐문 조사하는 형사처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김대리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그저 무시하고 지나쳐갈 공산이 크다. 아니라면 차를 멈추고 뛰쳐나와서 '홍대리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전화하고 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리지 뭐하려 바보같이 바깥에서 기다려',라고 친절하게 내 어깨를 부축하며 말을 걸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김대리를 발견했으나 나는 차를 멈추게 할 자신은 없었다. 그저 먼발치에 숨어서 그가 주차장을 유유히 빠져나갈 때까지 컨버터블 뒤꽁무니나 허망하게 바라봐야 할 것 같았다. 마치, 집고양이가 발코니 너머의 들고양이들을 구경하듯이…
그러다, 어디서 용기가 생긴 건지 김대리의 차 앞으로 뛰어가 그대로 배치기를 해버렸다. 물론 실제로 배치기를 했다는 건 아니다. 배부터 막으면 왠지 녀석이 멈출 수밖에 없을 거라는 예감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김대리는 내 배를 밟고 넘어가진 않았다. 컨버터블을 세우고 마치 더러운 벌레를 바라보는 것처럼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볼 뿐. 그러다 컨버터블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유유히 달아나버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김대리를 위에서 언급한 얌전한 고양이처럼 쳐다보기만 했다.
어디 영화에서 본 것은 있어서 지나가는 택시 하나를 곧장 불러 세웠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리곤 ‘아저씨 저 앞차를 따라갑시다!’라고 외쳤다. 택시 기사는 사건에 휘말린 것이 무료한 오후를 날려버릴 만한 신나는 일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벨트를 단단히 매라고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출발했으나 몇 블록도 지나지 못하고 김대리를 놓치고 말았다. 이 기사는 아마도 초보임이 분명했으리라.
어쨌거나 나는 김대리를 놓쳐버렸다. 복수할 기회를 날린 셈이었다. 결국 차일로 기회를 미뤄야 했다. 아쉽지만 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어디로 가든 김대리는 오늘 내로 집에 갈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내가 먼저 호랑이굴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된다. 그래 김대리의 집으로 쳐들어 가자.
그렇게 결심한 나는 녀석, - 이제 김대리라는 호칭은 생략하기로 한다. - 의 주소를 확인하기 위해 그룹웨어에 접속했다. 아직 내 아이디가 살아 있다. 당연한 결과였다. 아직까지 서류상으로 나는 퇴사자의 신분이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녀석의 개인정보를 클릭한 후 간단하게 주소를 알아냈다. 강남구 역삼동 모 오피스텔이었다.
마침 플라자호텔에서 역삼동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곧바로 역삼동까지 날아간 후, 한달음에 그의 오피스텔 10층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발로 문을 강하게 걷어차며 초인종 버튼이 부서지도록 거칠게 눌러댔으나 그 소리에 반응하는 쪽은 녀석이 아니라 눈을 흘겨대는 이웃들 뿐이었다.
나는 작전상 일단 후회해야 할 듯싶었다. 다시 건물 주차장 입구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든가, 아니면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든가. 둘 중의 선택지가 하나뿐이었지만, 결국 중대한 선택을 하기로 작정했다.
1층 카페에 내려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하고 잠시 바깥에서 숨을 고르곤, 2차전을 위해 10층으로 다시 올랐다. 이번에는 비교적 평온한 자세로 일단 녀석이 집에 있든 그렇지 않든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도어록을 강제로 해제하자고 결심한 것이었다.
도어록은 비밀번호를 세 차례 실패하면 락이 걸린다. 그러니 세 번 실패해서 내가 진입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녀석도 곤란함을 겪게 된다. 운이 좋아서 3번 이내에 성공한다면 나는 녀석의 본거지를 털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셈이다. 나쁘지 않다. 좋지도 않지만 나쁜 건 적어도 없다. 공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것은 그저 게임이다. 다양한 모양의 열쇠를 들고 구멍에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나는 첫 번째로 그의 사번을 시도했다. 애석하게도 첫 번째 입력은 실패였다. 두 번째는 녀석의 생일이었다. 아쉽게도 그의 생일을 모른다. 녀석이 언제 태어났는지 내가 알게 뭐랴. 그룹웨어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시도해봤다. 손이 덜덜 떨리는데, 옆집이 문을 빠끔히 열고 조용히 누르라고 주의를 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제발 은밀히 하면 좀 안 되겠냐고. 그렇게 말할 것 만 같았다.
나는 마치 깊숙한 수면 아래로 침투하는 다이버처럼 한꺼번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숨을 몰아서 쉬었다. 하지만 또다시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마지막 기회만 남았다. 이번 기회에 통과하지 못하면 녀석의 집으로 침투할 방법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이것도 불가능하다면 나는 오피스텔 외벽을 통해서 진입하는 방법밖에 없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다. 머리를 쥐어짜 내 보자. 아이큐를 순간 2,000까지 끌어모으는 것이다. 영혼을 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