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미행

평범한 개발자의 독립 일대기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나는 마지막으로 녀석의 프로젝트 데드라인 날짜를 입력하기로 했다. 조심조심, 실수는 이제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4자리의 숫자를 한 글자씩 1초마다 정확히 입력했다. 딩동댕, 앗 문이 열렸다. 영화보다 더 박진감 있게 스토리가 전개된다. 역시 현실은 영화보다 재밌다.


그가 집에 숨어 있건 그렇지 않건, 나는 이제 그의 소굴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나는 돈키호테처럼 자신감 넘치게 문을 열어젖힌다음,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김대리야 나와라! 내 칼을 받아라!’라고. 하지만 칼 따위 같은 건 없었다. 흔하디 흔한 커터칼 같은 것조차도… 대신 신발이라도 날렸어야 했나.


의도치 않게 이야기가 추리소설이라는 선로 위를 위태롭게 달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창조적인 작가도, 세상의 문을 연 절대자도,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법을 엉터리로 사용해대는 작가도 아니다. 그저 그날의 일들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웃들이 눈치채기 전에 도어를 닭 모가지 비틀 듯 돌린 후, 안으로 재빠르게 진입했다. 현관 입구 등이 갑자기 켜지는 바람에 깜짝 놀랐지만, 내부엔 외로운 하품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어쩌면 어딘가 녀석이 교묘하게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적잖게 긴장이 되긴 했지만, 그럴 경우엔 오히려 맞서 싸우면 된다고, 이판사판이라고 작정했기 때문에 딱히 공포스러운 상황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곳엔 이렇다 할 반전 스토리 같은 건 없었다. 독자들은 UFC 대결 같은 큰 판을 기대했겠지만, 내 부족한 수사법으로는 역부족이 아닌가. 역시 예상한 대로 녀석은 부재중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이 설득력을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남의 집에 몰래 침입한 상태에서 주인의 귀가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은근히 들뜨게 만들었다. 나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집에서 준비해 간 까만 비닐봉지 두 개를 신발에 칭칭 감았다. 어디선가 영화에서 본 장면 덕분이었다. 다소 볼품없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곳에 침입했다는 사실만 감추면 그만이었다.


신발에 비닐봉지를 씌우고 발목에 그것을 적당하게 묶어둔 다음 거실로 진입했다. 화장실과 싱크대를 사이에 두고 좁은 현관을 지나치니 바로 거실이 나타났다. 드디어 녀석의 본거지가 완전히 확보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간이 격벽을 지나자 안쪽으로 기다란 책상과 책장이 기역자 형태로 놓여있었는데, 조명이 어두워서인지 그 형태가 아른아른할 뿐 어떤 구체성을 띄진 못했다. 그렇다고 녀석의 공간을 두루 구경하겠다고 베란다의 커튼을 열어두고 환하게 햇살이 거실까지 드나들도록 허락할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녀석은 언제든 집으로 돌아올 수 있고, 그때 거실이 환하게 열린 모습을 본다면 그에게 대응할 여지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므로, 오히려 역습을 당할 수도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런 빌미 자체를 제공하는 게 싫었다. 녀석이 공격을 당한다면 무방비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승산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다소 답답하긴 했지만 어두운 상태에서 녀석의 집을 조사하기로 작정했다. 눈이 그곳에 적응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소요될 뿐이라서, 나는 단순하게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얼마간 침착하게 시간을 보내자, 감사하게도 눈이 공간에 적응했다. 침침하던 것들이 보다 명료해지고 빛을 받지 못해서 소외되던 물체들이 제 살갗을 노출했다.


30센티미터쯤 될까? 책상 치고는 다소 좁은 폭. 그 책상 위엔 2칸 정도의 간이 책꽂이가 놓여 있고 그 위엔 누런 화이트보드가 장식되어 있었다. 화이트보드가 누렇다니 지저분한 놈.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녀석이 화이트보드에 장식해놓은 온갖 모양의 포스트잇, 사진, 표식, 그리고 불순한 행동 강령들이었다.


그 화이트보드엔 내 사진, 연예인도 아닌 내 사진이 화이트보드 정중앙에 떡하니 붙어 있어야 했을까, 그런데 좋아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 사진을 중심으로 X자 모양으로 빨간 테이프가 붙여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내 사진 옆에는 큰 글자가 연달아 쓰여있었는데 그 단어가 지칭하는 특정한 시점이 문제였다. 그 시점은 3년 전 어느 날이었는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사내 창업 경진대회에서 내가 우승한 날짜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짜를 중심으로 녀석은 나의 주요 일상을 추적하고 있었다. 마치 특별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지만, 복수를 설계하고 한 단계씩 무엇이든 실행하고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깊은 결핍과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면, 그 어떠한 수단이라도 반드시 결행하고야 말겠다는 어떤 깊은 투지 같은 것이 화이트보드에 그대로 서려있었던 것이다. 화이트보드에는 회사에서 거둔 나의 모든 실적 그러니까 해커톤 대회 우수상, 기술연구소 소장과 함께 공저로 출간했던 출판물들의 표지 사진과 기념사진, 논문 실적, 창업경진대회에서 얻은 부상 5백만 원과 기념으로 유럽으로 연수를 다녀온 비행기 티켓과 녀석에게 자랑했던 베를린 필하모닉 티켓. - 헉, 베를린 필하모닉 티켓이 어느 날 집에서 사라졌는데, 그것이 녀석에게 전리품처럼 사용되고 있었다니, 나는 두 번째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녀석의 질투는 내가 회사에서 거둔 수상 경력과 부상으로 받은 해외 연수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 지금 모두 기억이 났다. 예선을 거쳐서 나는 결선까지 어렵지 않게 올랐고 그때마다 녀석과 경쟁 구도에 놓여있었다는 것, 다만 나는 그때 녀석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든 경험하는 것 자체를 순수하게 좋아했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것을 아이디어로 연결시키는 것은 더욱 좋아했다. 나에게 창업경진대회란 것은 그저 관심 있는 대상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경험하는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창업경진대회란 것이 물론 거창한 이벤트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그마한 시장에서 구경꾼들이 잠시 모여드는 그런 저렴한 마술쇼 같은 것이었다. 그럴듯한 아이디어, 그러니까 실제 비즈니스 가능성보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A4 두 장 정도로 정리해서 제출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나머지는 평가장에서 어필하면 되는 것.


나는 당돌하게도 프레젠테이션 자료 같은 건 만들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전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생산된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말이라는 수단으로써 그러니까 혀의 현란한 드리블의 형태로서 표현하면 그만이었다. 딱히 시간을 투자해서 우승한 다음, 그 상금으로 유럽 연수를 다녀와야겠다고 야망을 품은 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 당시 대회에 비교적 마음을 가볍게 품고 출전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창업경진대회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그 당시 나의 실적에 불만을 품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본인이 우승하여 상금도 타 먹고 해외 연수 기회도 동시에 노렸을 공산이 컸다. 아마도 그 자리가 제 것이었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나라는 변수가 갑자기 수면 위에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자신의 계획이 나라는 방해물 때문에 망쳐졌고 계획이 순조롭지 못한 구석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아마도 녀석은 그때부터 나를 타깃으로 삼고 반드시 척결시켜야할 예외처리 따위로 설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성공 스토리를 위해서 반드시 눈앞에서 제거되어야 할 티눈 같은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녀석은 화이트보드 정가운데 내 사진을 비롯하여 나의 모든 경력과 실적들을 정리하고 어떤 과정으로 몇 년 동안 나를 제거하고 압박할지 기회를 포착하고 있었다. 주변의 어떤 사람들을 포섭해서 이용할지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조심 소심 사냥하듯 계획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정해진 순서대로 거기에 휘말려 들고 만 것이었다. 아무런 제재 없이 나라는 허수아비를 그곳에 세워두고 온갖 비방과 모략질을 해대며 송곳으로 내 심장을 쪼아댔다. 어쩌면 내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그의 계획에 휘말려버린 것은 그가 정교하게 준비한 작업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저주에 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때 삑삑 소리가 현관 쪽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바로 어떤 리액션을 즉각적으로 취해야 했는데, 마치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처럼 최단 시간 내에, 긴급 미션을 수행하듯이 어딘가에 몸을 숨겨야 했다. 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복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고 소리는 나지 않지만 최대한 부리나케 위쪽으로 거의 구르다시피 몸을 던져 올렸다. 모든 과정은 녀석이 나머지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인, 단 1초 내에 이루어져야 했다.


비교적 몸이 날렵한 나는 그 과정을 거의 0.5초 내에 수행해냈다. 거의 완벽한 동작이었다. 나는 또한 아무 소리도 녀석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빈틈없이 동작을 단 한 번에 행해야 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내 동작이 거의 만점에 육박했을 거라고 추정하는 것은 녀석이 내부에 진입하자마자 누군가와 편안하게 통화하는 목소리 덕분이었다. 나는 몸을 낮게 엎드리곤, 침대 밑의 공간 속으로 몸을 납작하게 굴렸다. 그리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몸을 안쪽으로 더 깊숙이 숨겼다.


녀석은 들어오자마자 급한 볼일 따위는 보지도 않고 스피커폰부터 켜놓더니 소파에 털썩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했다.


“길박사님 고맙습니다. 오늘 진흥원 담당자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길박사님이 힘써주신 덕분에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될 것 같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길박사님이 아니었으면 절대 불가능한 관문이었어요. 길박사님이 홍대리를 오래 잡아둔 덕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교수님보다 길박사님의 힘이 더 크게 작용했다니까요. 나교수님이야 솔직히 명함으로 사는 분이지, 실무적으로 연구소를 이끄는 사람은 길박사님이잖아요. 길박사님이야 말로 업계 최고의 두뇌 아닙니까.”


“하하, 그런가요? 저야 뭐 선배님들에게 전화 몇 통 돌린 게 전부죠. 나중에 최종적으로 선정되면 사례는 해야겠지만, 그래도 과제가 잘 된 것은 김대리님의 치밀한 설계와 실행력 덕분 아니겠습니까? 저도 과제라면 나교수님 밑에서 실무적으로 숱하게 경험했지만, 김대리님처럼 스케일을 크게 벌려놓고도 그것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하는 분은 처음 봤어요. 놀라운 장악력이자 지배력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더 놀란 것은 김대리님의 섭외력이었어요. 어떻게 단기간에 까다로운 나교수님과 진흥원 담당자까지 포섭하신 건지, 혀를 내둘렀다니까요.”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 홍대리에 대한 반감 때문에 시작한 프로젝트였죠. 말하자면 한 인간을 몰락시키기 위해서 시작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한 사람을 파멸시키려는 게 다소 지나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승부욕으로 죽고 사는 인간이라, 게다가 홍대리가 별다른 노력도 하지도 않고 마치 천재인 것 마냥 대우를 받는 게 너무 싫었어요. 저는 밤낮없이 심신도 돌보지 않고 오직 노력 또 노력으로 일을 해도 될까 말까인데, 홍대리는 일하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빈둥거리면서 일을 하더라고요. 그러고도 늘 높은 결과를 거두었으니..."


“어느 날 저에게 이러더군요. ‘일이란 건 우뇌가 알아서 하는 거야. 얼간이들이나 밤새며, 온갖 것들 다 동원해놓고 시끄럽게 설친다고’ 이렇게요. 빈 깡통이 원래 요란하지 않냐고 하면서, 제가 하는 일을 대놓고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에이, 설마 홍대리가 김대리님을 지칭했겠어요? 그저 홍대리의 말 스타일 아닐까요? 천재는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보통 직감하지 못하죠. '그냥 이 쉬운 걸 대체 왜 못하는 거야?' 라고 말할 뿐이에요. 누구에겐 아주 당연한 일이고 누구에겐 식탁 위에 가만히 놓은 젓가락을 들지도 못하는 일이 되는 거죠. 홍대리는 그냥 홍대리답게 무심하게 말을 한 거예요”


“물론 그건 잘 알죠. 알아요. 그걸 모르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런 사실을 홍대리가 지각하지도 못한 채, 겸손하지 못하게 나불대는 것이 꼴 보기 싫었을 뿐이에요. 자각하건 그렇지 못하건 관심 없어요. 단지 그놈이 내 눈앞에서 시건방을 떨었다는 사실이 문제고, 내가 그것에 화가 났다는 게 더 큰 문제인 겁니다. 제가 분노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니까 그런 방식이 제 안의 어딘가 중요한 것을 건드리고 상해를 입혔다는 겁니다.”


“하하, 김대리님은 분노의 화신 같네요. 그래서 지금 그렇게 복수? 란 걸 하셔서, 보란 듯이 성공이란 걸 거둘 직전까지 오신 것 같은데요. 기분이 어떠신지 모르겠어요. 후련하십니까? 통쾌하신가요? 이제 화가 좀 가라앉았나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더 화가 나요. 그놈과 제대로 정면대결을 펼쳤어야 하는데, 솔직히 그러지 못했잖아요.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공략했던 일본과 솔직히 다를 바가 없잖아요.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상황을 무시하다 뒤통수를 거세게 한 대 맞은 것뿐인데요. 뭐 그나마 긍정적인 것은 오늘 낮에 놈이 제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이네요.’


“헉! 그래요? 홍대리가 김대리님을 찾아왔어요?”


“네 점심때 플라자 호텔에 찾아왔더라고요. 주먹이라도 한 대 휘두르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 앞에 서서 잠시 까불어대더니 그게 전부더라고요. 지나가는 차는 어찌 막았는데, 그다음 단계에 해야 할 일은 구체적으로 프로그램하지 못한 거죠. 즉흥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부류들의 특징 아니겠습니까? 그게 홍대리의 문제죠.”


“아하, 그렇군요. 홍대리가 김대리님을 찾아왔지만,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얘기네요. 허망하게 빈 바구니만 확인한 셈이군요. 또다시 김대리님의 승리네요? “


“네 승리가 중요한 건 아니고요. 일단 일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연구비는 곧 타게 됐으니 멋지게 일을 해나가야 하겠죠. 조만간 나교수님이랑 같이 근사한 곳에서 식사나 해요. 제가 제법 괜찮은 레스토랑으로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래요. 조만간에 뵈어요. 그럼 또 연락해요”


“네 그럼”


녀석은 길박사와 통화를 마쳤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시계를 확인하더니 또 다른 약속이 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것인지, 잠깐 자리에 멈춰 서서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대체, 뭔 꿍꿍이를 부리려는 걸까.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실, 나는 좀 전에 길박사와 녀석의 통화가 진행되면서 적잖게 놀랐다. 너무 놀라서 침을 꿀꺽 집어삼키고 말았는데, 그 반응과 함께 헉 소리를 나도 모르게 내지르고 말았다. 다행히 녀석이 길박사와 큰 목소리로 통화를 하는 바람에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나간 것 같진 않았다. 그만큼 내가 받은 충격이 심상치 않았다는 얘기였지만…


순간, 나는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 같은 것을 억제하기 어려워, 어쩌면 단 한순간에 아래층으로 뛰어내려 가 녀석의 멱살을 붙들고 오른손으로 녀석의 왼쪽 뺨을 실컷 후 갈겨 주고 싶을 심경이었지만, 그렇게 행동하진 못했다. 그럴만한 배포도, 자신감도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가 훗날 다가올 예기치 못할 더 심각한 파국의 순간을 긴급하게 예상했기 때문이리라.


그런 상상을 하며 바닥에 납작하게 파전처럼 엎드려 있었는데, 녀석에게 다른 용무가 생긴 건지, 바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침대 밑바닥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그의 집에서 외출을 선택한 다음, 나는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버리는 바람에 나도모르게 그만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녀석의 복층, 침대 밑 바닥에 잠시 누운 것 뿐이었는데, 갑자기 온갖 모양의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순식간에 나를 노획한 것이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기운에 휩싸인 채, 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바다위를 둥둥 떠다녔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은 한낱 꿈에 불과하고 모든 사건은 그저 신기루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잠을 잔 것인지, 이대로 잠들었다가 다시 김대리가 들어오면 그때는 일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너무나 오랜만에 마치 사랑하는 애인 무릎 위에서 낮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달콤하고 편안한 잠을 맛본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세상에게 ‘네 마음대로 해버려 나도 더이상 못해먹겠어’, 라고 외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모든게 제멋대로, 기분 내키는대로 흘러가는 마당에,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게 있느냐,라는 자포자기의 감정이었달까.


나는 상황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나름 어떤 결과를 상정해봤다. 이대로 계속 편안하게 바닥에 누워있다간, 언젠가 김대리가 집에 도착할 것이다. 김대리는 아무렇지 않게 도어락을 누르고 들어와 신발을 벗어놓고 가방을 소파위에 던져놓은다음, 대충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샤워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태평하게 거실 한가운데 앉아 잠시 넷플릭스를 시청하다, 맥주와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먹다가, 하루를 마감할 것이다. 그리곤 지금 내가 누워있는 복층위로 어슬렁어슬렁 올라오겠지.


그러면 녀석은 떡하니 침대에 누워있거나 혹은 바닥에 누워 있는 나를 우연히 발견할 지도 모른다. 일단 귀신인지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할 테니, 놀라는 것은 첫 번째고 아무런 방어태세도 갖추지 못한 녀석은 놀란나머지 뒷걸음질을 치다, 뒤쪽에 계단이 있는지도 모르고 자빠지게 되겠지. 뒤로 여러번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다가 후두부를 난간에 강하게 충격하는 것이다. 난간 일부가 휘어지고 녀석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나체의 형태로 녀석이 뻗어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되는 걸 희망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래도 어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기분에 마음이 들떠서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녀석의 상태를 체크하겠지. 그런데 호흡은 지극히 정상이고 약간의 충격만 받았을 뿐이다. 다행이다. 목숨은 건졌다. 살인자가 될 뻔했는데, 녀석은 약간의 찰과상만 입었을 뿐, 겉으로 보기엔 큰 이상은 없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자리를 뜬다. 마치, 친구집에 놀러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는 이런 상상을 반복해서 했다. 녀석이 들어오면 나는 어떤 동작, 혹은 어떤 표정을 더 기묘하고 극적인 자세로 취해볼까 연구해봤다. 핸드폰 후레쉬라도 가동시켜서 그걸 얼굴에 들이대면 더 극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상상해보기도 하고, 그냥 소리를 질러서 더 분위기를 극대화시킨 형태로 놀라게 해줄까, 궁리를 해보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 사건을 더 극적으로 고조시킬 수 있을지, 생각하며 온갖 기묘한 아이디어들을 상정해봤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이 공간은 녀석에게 속한 곳이고 나는 지극히 이방인에 불과할 뿐이다. 여긴 녀석의 홈그라운드다. 나는 공간이 주는 어떤 친밀함과 공간적인 특징을 이용할 수 없다. 심지어는 어느 곳에 무기가 숨겨져 있는지 그런 요새적인 것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무력감을 한아름 안은 채, 녀석의 본거지에 누워서 신세한탄을 하다가, 아무런 복수극도 현실세계인 이곳에서 수용될 수 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생각에 더 깊은 허무에 빠져, 물기가 빠진 생선처럼 지느러미를 허우적대는 것 뿐이다. 그게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나는 허탈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오케이 목장에서 방금 혈투를 마친 사나이처럼 모양 빠진 혈색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곤 내 사진이 찍힌 화이트보드를 한 번 바라보고 혹시 나중에 사용될지도 모르니, 구석구석 사진을 촬영해놓은 다음 다시 현관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내가 주인인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세로, 신발에 쒸운 비닐봉지를 벗겨낸 후, 만약 점수를 준다면 거의 만점에 가까운 연기력으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1층에 내려와서 오피스텔 바깥으로 나오니, 문득 내가 갈 곳이 거의 없다는 생각, 오히려 내가 몇 시간동안 머물던 곳이 어쩌면 내집이어야하지 않았을까, 라는 이상한 망상만 들 뿐. 바깥 세상은 이미 어둠이 한가득했다.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를 찾아 바로 들어갔다.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한산했다. 빈 자리를 고르곤 차가운 얼음이 가득 든 커피를 주문했다. 음료를 찾아들고 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에는 어떤 남자가 엄청나게 바쁜 듯이 일에 열중이었다. 노트북 스탠드를 펼쳐놓고 스타벅스 공식인 맥북프로를 꺼내더니 그 위에 올려놓고 옆엔 휴대용 모니터를 꺼내서 펼쳐놓고 커다란 소니 헤드폰을 귀에 걸치더니, 블루투스 키보드와 마우스를 꺼내놓고 연결했다.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엄청나게 스케일이 큰 준비작업을 준비하더니 휴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곤 잉글리시 프리미어 축구를 틀었다. 흠, 나는 뭔가 의미심장한 코딩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싱겁다. 싱거운 커피맛 만큼, 남자도 스타벅스도, 내 삶도 싱겁기만 하다.


거창한 장비들을 줄줄이 쌓아놓고 잉글리시 프리미어 축구를 무심하게 즐기던 남자가 마치 비디오 되감기를 하듯 다시 역순으로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노트북 전원을 내리고 덮개를 닫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분리하고 다시 노트북 스탠드롤 휴대용 망원경 접듯이 그렇게 작은 부피로 줄이고 가방 안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많은 장비들이 어떻게 12치정도의 가방에 모두 들어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 남자는 남은 음료와 모두 마셔버리고 책상 위에 놓인 쓰레기등을 버리더니 유유히 자리를 떴다. 마치 루이스 캐럴의 소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가 사라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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